124, 벌초하는 날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10:29

( 2004년 9월 22일 수요일 )

"해와 달과 별을 언제 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나
요즈음 나는 그런 느낌으로 여러 날들을 보냈습니다.

비록 날씨 탓이긴 해도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한 채 미뤄놓곤 하다보면
느긋하지 못한 성질탓에
무언가에 자꾸 쫓기는 듯 조급함으로 나날을 보내곤 합니다.

가을이라 하면
맑고 푸른 하늘과 흐늘거리는 코스모스와 함께 제일먼저 연상되는 그림이건만
이틀이 멀다하고 줄곧 비만 내려서
실제로 해와 달과 별과 파란하늘을 언제 봤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사흘전부터 내리기 시작했던 비가 벌초를 계획하고 있었던 오늘 새벽까지 계속되기에
비를 맞고서라도 할 심사로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에 집을 나섰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에서 아침을 맞은 셈이 되었지만
아침일찍 찾아온 손님처럼 낮설게 느껴지는 고향입니다.

예초기는 그리 무거운 기계는 아니지만
기계의 진동이 심해서 작업을 하다가 보면 팔이 저릴 정도로 힘이 많이드는 작업입니다.
더구나 가랑비에 젖지 않을려고 비옷을 입고 작업을 하다보니
몇 분도 채 되지않아서 속옷이 흥건히 젖어 팔과 다리로 땀이 흘러내립니다.

보온통의 얼음물은 이미 미지근해 져 있으나
목이 마르니 생명수와 다름이 없습니다.
새벽에 나올 때 아내가 챙겨준 빵으로 허기를 달래려고 풀밭에 앉으니
하늘엔 내 마음만큼이나 무거운 먹구름만 가득합니다.

내 어릴적엔 추석을 며칠 앞 두고서
벌초를 하러 가시던 아버님을 몇 번 따라다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땐 기계가 아닌 낫으로 풀을 베던 때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버님께서 벌초를 하고 계시는 동안에
나는 풀벌레를 쫓아다니거나 새콤한 청미래덩쿨의 열매를 따 먹기도 했습니다.

비록 도와드리지는 못했지만
적막한 산 속에 혼자 벌초를 하실 때 보다는
내가 곁에 있어드린 것만으로도 한결 든든해 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내에게 함께 가길 권하면 외면이야 하지는 않겠지만
남편이 땀을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며
무관심한 형제들에 대한 불만을 폭포처럼 쏟아낼 게 뻔한 일인데
나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마음을 접고 맙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내 부모님의 산소에 손질하는 일이란
혼자든 둘이든 아무런 잡념도 갖지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이나
일년에 겨우 한두번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서운함을 숨겨놓지 못하니
이런 내가 부끄럽고 한심스러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해서
부모님 산소와 조부모님 산소까지 모두 마치니 점심때가 가까워 옵니다.

어떤 일이든 하고 나면 성취감도 가질 수 있어서
일하는 과정에서 힘겨웠던 건 까마득히 잊혀지곤 합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때를 맞춰서 가랑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갈라진 틈 사이로 언뜻언뜻 파란 하늘도 보입니다.

추석이나 설이 돌아오면

객지를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내려 와

집집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는데

나의옛집은 주인을 잃은 채쓸쓸한 모습을 보면

속이 상하고 울컥해지곤 해서

나는 명절엔 고향생각이 간절하나 차마내려올 수가 없습니다.

올 추석도 그런 생각에 내려오지못올 것 같아서
미리 챙겨간 술을 가득 부어놓고 절을 하며
내 아내, 내 아이들, 내 가정
건강과 평안하게 해 주십사 하는 바램을 내려놓고 나니
왠지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 같습니다.

살아생전에

자식이 원하는 것이면뭐든 들어주시려 했던

내 부모님이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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