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금당산과 할머니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10:31

( 2004년 10월 12일 화요일 )


집 가까운 곳에 있는 금당산이 해발 350여m라고는 하지만
평소 등산을 끊임없이 다니는 나와 같은 사람도 단숨에 오르다 보면
구슬땀을 뻘뻘 흘리고 가쁜숨을 헐떡거려야만합니다.

내가 수년동안이나 이 산으로 운동을 다니면서도
이 산의 이름을 옥녀봉이라 잘 못 알고 있었던 것 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산에 있는 하나의 작은봉우리인 옥녀봉은 잘 알면서도
이 산이 금당산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어떤 연유로 옥녀(玉女)가 음기 센 여자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금당산의 옥녀봉은 풍수지리적으로 음기가 너무 세서

마주보이는 어떤 곳에 남자를 상징하는 바위를 세워놓았다니

그 유래와 소문이 사실인지는모를 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 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한때는 이 산의 주변에 사는 남자들은

옥녀봉에 의해 기를 빼앗겨버려 오래 살지 못한다는 소문에
이 산 자락에 들어선 신흥주택지가

한때 분양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는 일도 있었다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건강관리를 위해 끊임없이

이 산을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처음 이 산을 처음 다니기 시작할 때만 해도
산 주변엔 논과 밭도 있었고 사람들도 많이 살지 않았던지라
산을 오르내리는 길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그리 많지가 않았었는데
요즈음 이른 새벽엔 주로 연세가 조금 지극하신 분들이,
늦은 아침엔 부인네들이,
한 낮과 석양엔 주로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임이 없습니다.

몇년 전부터 이른 새벽시간과 눈비오는 날만 빼놓고서

늘 만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산 정상의 평평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서

산에 온 사람들에게 음료수와 막걸리를 파는
80세가 가까웠을 할머니가 바로 그 분입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조그마한 대야에 몇 병의 물과 막걸리를 담아놓고 앉아계시더니
지금은 넓지막한 돗자리를 펴 놓고서 맥주, 음료수, 오이, 과자 등등
날이 갈 수록 종류도 다양하게 늘어납니다.
언제 어떻게 산 위에까지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제법 큼지막한 아이스박스도 보이고
얼음이 얼어있는 물병도 간혹 눈에 띕니다.

그 할머니가 자리잡고 계시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아랫쪽엔
팔다남은 물건을 보관해 놓았을

제법 큼지막한 비가리게 포장꾸러미도 자리를 잡았는데
모르긴 해도 누군가 그 안에 보관해놓은 걸 가져다 먹었는지
어느날엔 그 포장꾸러미 앞에

"할머니 물건을 갖다 먹으면 죄받습니다"라는 큼직하게 쓴 팻말도 보입니다.

아침햇살이 따가운 어느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금당산을 오르다가
허름한 베낭에 무언가를 두툼하게 짊어지고 힘겹게 산을 오르는 사람을 봤는데
그날 팔 물건을 가지고 올라가는 그 할머니라는 것을

먼발치에서도 쉽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마음같아선 얼른 달려가서

짐을 넘겨받아 대신 짊어지고 올라갈 마음도 없지는 않았으나
나는 왠지 그럴 마음을 접은 채
조금 먼 샛길을 돌아서 산 정상으로 오르고 말았던 일이 있습니다.
짐을 덜어드리는 게 당연했지만
그 할머니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으로 심사가

복잡하게 얽혀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에게 넘겨들은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 연세가 몇이며 자식들은 아무도 없냐"고 물어 볼 때마다
"그런 것은 물어보지 말라"며 단 한 마디로 잘라버린다는 것입니다.
동정심에 앞서 뼈만 앙상한 백발의 늙은 할머니가
무거운 물건을 지고 산 위를 매일 오르내리며

고생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누구나 갖을 수 있는 생각입니다.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들 며느리가 한사코 말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손주녀석들 과자값이라도 벌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작년 여름 한 낮에 친구와 함께 금당산에 갔다가

할머니가 앉아계시는 곳을 지나오는 길에
"이렇게 땀을 흠뻑 흘린 날엔 막걸리가 최고"라며
막걸리 한병과 오이 하나를 사서 내게 권합니다.

목이 마를 때 시원한 막걸리 한사발 벌컥 들이키고 싶은 건
친구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본인은 건강 때문에 술은 입도 대지 않으면서도 나를 챙겨주는 게 고마워
막걸리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던 게
지금까지 할머니에게 물건을 팔아 준 이유일한 일이었지만
친구를 놔두고 혼자만 마셨다는 게 자꾸만 걸리고
힘겹게 지고 올라온 것을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는 무거운 생각도 없진 않았습니다.

내겐 그 할머니에 관해서 두마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무도 물건을 팔아주는 이가 없어서
늙은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와,
할머니가 가지고 올라왔던 물건을 다시 지고 내려가는 일이 없도록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물건을 모두 팔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작년 여름부턴 금당산 정상에 가면 늘 볼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더 늘었습니다.
아직 서른이 채 되지않았을 청년 한 사람이
할머니 앞쪽에 자리를 펴고 갖가지 물건을 놔두고서 앉아있더니
또 얼마후엔 마흔이 훨씬 넘었을 아주머니 한 사람이
보다 다양한 메뉴를 돗자리에 벌려놓고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젠 드디어 할머니가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서
산을 내려와야 할 때가 된 듯 싶어서 반가운 것인지,
그 자리마져 젊은이들에게 빼앗기고서 내려와야만 하는 탓에
애처러워 해야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며칠 전 해질녘에 금당산에 올라갔다가
베낭을 챙기고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봤습니다.
하루해가 산 아래로 저물며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비추는 붉은 석양빛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이제 금당산에도 서서히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당산의 겨울은 할머니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부터 시작되어
아래로 아래로 밀려 내려올 것입니다.

지난 겨울에 그랬던 것 처럼
찬 서리가 내리고 하얀 눈으로 덮히는 겨울동안 만큼은
지금처럼 금당산과 옥녀봉을 오르내리며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 볼 때마다
애처로워 할 일은 또 없으리라는 생각만으로는
추워서 싫기만 한 겨울도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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