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10월 25일 월요일 )
산뜻한 신록과 맑고 푸른 가을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늘푸르고 당당할 것 만 같았던 내 마음도
온 산을 붉게 물들이며 물밀듯이 아래로 내리 치닫는 단풍의 위세에
금새 기죽은 듯 움추러 들고 맙니다.
무심한 실바람에 마지막 남은 힘으로 파르르 떨던 잎이
채념한 듯 지친 몸뚱아리를 스르륵 풀어놓습니다.
고집스레 버텨서 말라 비틀어져가는 추한 뒷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생의 끈을 스스로 놓을 줄도 아는 이파리에서 의연함과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작은 파문을 그리며 죽어가는 마지막 그 순간만큼은
영원한 안식처로 되돌아가는 뒷모습이라서 숙연해 지는 시간입니다.
따스한 봄날 연록의 싱그러움도,
뜨거운 햇살아래 짙푸른 녹음의 상큼함도,
소슬바람 찬서리에 새빨갛게 멍이 든 단풍잎의 쓸쓸함도,
화려하게 피었다가 홀연히 지는 꽃의 탄식도
모두들 제몫을 다하는 모습들입니다.
꽃은 피어있을 때 화려함도 좋지만
질 때의 모습까지도 추하지 않아야 합니다.
꽃자루에 끈질기게 달라붙은 채 말라 비트러져 추한모습 보다는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찰라에 눈물처럼 쏙 빠지며 지는 꽃들이
비록 아쉽고 서러울지래도 차라리 아름다울 일입니다.
집착은 내 삶에 비춰봐도 결코 보기좋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화려한 장미 보다는 갯바람에 꽃잎 떨구는 해당화를 더 좋아합니다.
찬 서리에 찌들어져 가는 국화꽃 보다는
눈물처럼 쏙 빠지는 동백꽃과 진달래, 그리고 백합을 더 좋아합니다.
온실속에서 잘 길들여져 피어나는 형형색색의 화초보다는
단순해서 보잘 것 없을지래도
꽃잎 떨궈내 가을 찬바람 속으로 홀연히 떠나는 들꽃을 더 좋아합니다.
피는 듯 지고마는 꽃처럼
우리는 반겨 맞이하고 아쉬움속에 떠나보내는 일을 쉽없이 하고 삽니다.
만남의 길고 짧음은 있을지언정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미리 접어야만 합니다.
만날 때 헤어짐을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떠나보내는 아쉬움도 가슴속에 미리 새겨 놓아야만 합니다.
붙잡는다 해서 있어 줄 것도 아니기에
떠나 보낸 뒤 허전하고 시린가슴 다독이는 것이 차라리 좋을 일입니다.
실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이 아름다운 것 처럼,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그 순간의 꽃잎이 아름다운 것 처럼,
아쉬움 남겨놓은 채 홀연히 떠나가는 우리들의 뒷모습도
그 처럼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해 봅니다.
지는 낙엽을 보며
나도 모르는 새에 심난스러워 하고 있었는지
아내가 불쑥 "가라앉은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라며 묻습니다.
오래 살다보면
남편의 뒷모습만 봐도 심사를 헤아릴 수 있게되나 봅니다.
생리기간엔 평소보다 조금신경이 예민해지곤했던 아내였기에
"남자도 주기적으로 생리를 하는 걸 모르냐?" 되물으며
피식 웃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