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그해 겨울, 내 고향의 풍경. )
( 2005년 4월 06일 수요일 ) 목련이 필 때면 늘 비가오곤 했습니다.비만 오는 것이 아니라 바람도 함께 불어서 갖피어난 여린 꽃을 송두리째 떨어뜨리거나 하얀꽃잎에 상처를 남겨놓고 떠나곤 했습니다. 목련이 필 때면 실제로 항상 비가 왔던 것이 아님에도 상처난 하얀꽃잎을 늘 마음속에 담아뒀던 탓에 목련이 필 때는 늘 비가왔던 것으로 기억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얀속살을 드러낸 목련은 금방이라도 망울을 터뜨리려는데 비가 오려는지 아침부터 먹구름이 가득하고 바람은 어제보다는 잠잠해 졌지만 간혹 나뭇가지도 흔들며 지나갑니다. 비가 내릴 양이면 아직 피지않은 목련이 예쁘게 피어날 수 있도록 촉촉히 적셔주는 그런 꽃비였으면 좋겠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고향의 옛집 대문옆에는 한 그루의 목련나무가 주인대신 다 쓰러져가는 빈집을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그 목련은 내가 고뇌에 휩싸여 힘겨워하던 시절의 어느 봄날 건너마을 묘목농장에서 인부를 동원하여 작업을 한다기에 생전 처음으로 남의 집에 삽을 들고 일을 하러 갔다가 인부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하루종일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삽질을 하고서 작으마한 목련 한 그루를 하루 일의 댓가로 받아서 심어놓았는데 벌써 30여년 전의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밥상을 내어 오신 어머님께선 손바닥이 터져 피가 나도록 일을 하고 온 아들이 안스러워 "꽃만 피고 열매를 맺지않은 나무를 심어 뭐하냐"며 가엾은 아들의 손을 어루만지시며 눈물바람을 하셨습니다. 내가 어머니 곁을 떠나온 이후 그 목련나무에서 하얗게 꽃을 피울 때마다 물집생겨 터진 아들의 손이 생각나서 눈물을 흘리시곤 하셨다기에 차라리 그 나무를 파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말씀을 드렸더니 오히려 나를 나무라시며 역정을 내셨던 내 어머님이셨습니다. 목련이 피어나고 비가 오려니 지금쯤 탐스럽게 꽃망울을 맺은 채 옛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목련과 목련꽃을 바라보며 아들생각에 눈물지으시던 어머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행여 어머님께서 비바람에 지고마는 꽃을 바라보며 못내 안타까워 하실까봐 비가 내릴 양이면 여린꽃잎을 촉촉히 적셔주는 그런 꽃비이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목련이 필 때마다 갖는 바램이기도 합니다.
( 2003년 겨울, 이젠 내 기억속에서나 그려 볼 수 있는 애틋한 내 고향....나의 옛집......대문곁엔 목련이....) 몇년 전부터 이웃에 살고 계서던 분께서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다쓰러져 가는 나의 옛집을 사고싶다는 전갈이 여러 경로를 통해 몇번 씩이나 오곤 했습니다. 내 집 바로앞에 다 쓰러져가는 폐가가 있다면 신경에 거슬리는 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형제들이 합심해서 새로 짓거나 고쳐서 관리를 잘 한다면 모를 일이나 모두들 제 살림하기에 바쁘고 복잡한 일에 관여를 안 하려 해서 이래저래 심난스러웠던 일이었습니다. 마침 가까운 곳에 큰누님이 살고 계셨기에 내 부모님 삶의 터전이요 형제들의 요람만큼은 지키고 싶은 마음에 "누님께서 그 터에 새로 집을 지어 살면 어떻겠냐"고 의중을 타진해봤으나 여러가지로 깊은 생각을 하신 끝에 집을 짓는 일은 접고 말았기에 "보존을 못하고 험상궂게 하여 부모님을 욕되게 하느니 차라리 남에게 넘겨주는게 낮겠다"는 형제들의 의견에 따라 내 부모님의 터와 형제들의 요람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로 부터 몇 달 만에 고향에 가보니 나의 옛집이 흔적없이 사라진 그 자리엔 낮선 집이 자리를 차지한 채 새로 쌓은 담장너머로 내가 심어놓은 목련만 유일하게 남아 고개를 내민 채 옛주인을 맞이 할 때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입술 깨물며 삼켜야만 했습니다. 차라리 쓰러져가는 빈 집으로 뒀으면 이 처럼 서럽지는 않았을텐데....... 뒤늦은 후회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나 내가 심어놓은 목련이 그나마 자리를 지키며 옛 주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