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3월 28일 일요일 )
어제 오후엔 혼자 집을 지키려니 답답하여
차를 몰고서 시외를 한시간 남짓 배회하다
"原始泉"이라 일컷는 맑은샘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식구들이 마실 물을 한통 길러서 돌아왔습니다.
간간히 마을의 담장너머로 피어난 하얀목련이 파란하늘빛에 눈부시게 곱고
울타리엔 활짝 핀 개나리꽃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채
바람결에 흐느적거리는 마을풍경이 한가롭기만 합니다.
산자락을 끼고 도는 신작로를 지나면서 보니
지난 산행때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았던 진달래가
여기저기에 연분홍 꽃을 피워놓고 있습니다.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난 모든 생명들이
한결같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때인 탓에
나 역시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쫓기는 듯 마음이 바빠집니다.
목련꽃은 왜 한결같이 북쪽 하늘을 향해서 피는지,
그 꽃에 얽혀있는 전설을 들었던 까마득히 먼 옛 일 하나가 떠오르곤 합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자취집에서
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관절마다 염증이 생기는 병을 얻어
집에서 요양을 하고 계시던 주인댁의 따님은
시골 촌티가 아직도 물씬 베어있는 까까머리의 촌놈에게는
어머니(주인댁 아주머니) 몰래 먹거리를 가져다주시던 고마운 분이었으며,
어떨 땐 그분께 말동무가 되어줘야만 했던 까닭에
내심 귀찮을 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분께는 친구도 없었는지 찾아오는 이를 한번도 보질 못했으며
아무런 말벗도 없어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그분에게 있어서
새 들어사는 중학교 2학년의 촌놈과,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는 자취방 앞 마루야 말로
그분께 있어선 유일한 친구요 썩 괜찮은 놀이터였을런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분께 들었던 숱한 이야기들 중엔
콩쥐팥쥐에서 부터 신데렐라는 물론
내가 이미 봤던 만화책 이야기도 더러 있었지만
아직도 또렷히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의 하나가 바로
백목련은 왜 북쪽하늘을 향한 채 꽃을 피는지
자목련은 왜 핏빛인지
목련꽃에 얽혀있는 슬픈이야기입니다.

핏기가 없어 백짓장처럼 하얀 얼굴엔 언제나 수심이 가득해 보였고
손 마디마다 흉하게 부어올라 무섭기만 했었던 그분께서
하필이면 내가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기 며칠 전에 결국 저 세상으로 떠나셨기에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 하얀목련을 듣거나 목련이 피어날 무렵이면
그때 들었던 이야기 한토막과 그분 생각이 나곤 합니다.
목련꽃이 내게 그리슬픈 꽃이 될만한 이유도 없었고,
목련꽃에 그리슬픈 사연을 가슴에 담고 살 일도 없었지만
예전 그런 일이 있었던지라
그 꽃에 대한 의미가 조금 다르게 와 닿곤 합니다.
들꽃사진을 찍다 보면
작은 녀석들은 심도를 얕게 해서 배경도 맘대로 흐리게 할 수 있고
촛점 또한 맞추기가 쉬워서 내 의도대로 찍는데 큰 어려움이 없으나
등치가 큰 녀석들은 그 반대라서 찍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목련이 더 어려운 것은
꽃이 필 무렵이면 꽃샘추위에 얼어버리거나
어김없이 비바람이 불어 꽃에 상처가 생겨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른 봄에 피어나 반갑기 그지없어야 할 꽃이지만
주인집 따님과 꽃의 전설과 비바람에 상처를 쉽게 입는 여린 꽃이라서
기쁨보다는 이래저래 서글픈 마음만 생겨나는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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