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흔들거리는 하루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10:08
( 2004, 2, 5 )

기차를 탄 건 몇 십년만의 일입니다.

평소 여행을 즐기고 사는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맞춰 기차역까지 오가는 불편함 보다는
언제든 탈 수 있는 버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차창밖에 때를 맞춰 함박눈이 내려주지 않았었더라면
눈내리는 풍경마져 바라볼 수 없었더라면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10여분의 여유시간을 참아내지 못하고
내렸을런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바쁠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잠시의 시간조차 견뎌내지 못할만큼 급한 성질이 아님에도
어디론가 가야한다는 그 생각하나 때문에
정체되어있는 잠시의 순간조차 참아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때문입니다.

하도 오랜만에 타는 기차라 낮설긴 했지만
사람들도 듬성듬성 한가롭고

좌우로 적당히 흔들거려 주는 기차에 몸을 기댄 채
스르르 잠이 들어 한 시간쯤 아주 깊은 잠을 잤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뒤 또 한시간 반 쯤은
영사기의 필름이 돌아가듯끊임없이 바뀌는 차창밖 풍경에 심취해 있는 동안
내 의식 안에 잡념같은 것이 끼어들 틈새조차 생기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서대전 역이라고 합니다.
처음 가보는 곳입니다.
막상 내리긴 했지만, 그리고 역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출발할 때 함박눈이 내렸는데
기차로 두시간 반 거리에 있는 이곳 거리는 겨울햇살이 가득합니다.

누구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어디를 찾아 갈 것도 아니라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내쪽이 어딘지조차 물어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걷다가 찻집에 들어가 차 한잔을 시켰습니다.
무심결에 시킨 것이 녹차입니다.
찻잔의 온기가 참 좋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때를 맞춰 작년봄에 갔던 남녘의 차밭 전경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한 낮이라서 그런지 손님도 없는 찻집이라
아가씨한테 따끈한 물주전자를 가져오게 해
찻물이 우려나오지 않을 때까지 네다섯번 쯤 우려마시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신문쪼가리만 뒤적거리면서
한시간 가까이 앉아있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찻집에서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꼇으니 점심때가 훨씬 지난 듯 싶었습니다.
기차역에서 더 멀리 걷는다면 되돌아 올 일도 걱정되어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걷습니다.

양지바른 곳 포장마차에서 풍겨나오는 구수한 냄새는
허기진 탓에 더 그랬을거라는 생각입니다.
문득 술 한잔 하고싶어져 그곳에 들어가니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주인아낙이 반갑게 맞습니다.

겨울엔 국물맛이 개운한 오댕국도 괜찮은 술안주이자
한끼니를 떼울 수 있는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소주 한병을 모두 비웠음에도 취기라곤 전혀느낄 수 없어또 한병을 시켰으나

주인아낙의눈빛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반병 쯤은 남겨놓고 나왔습니다.

기차역에 되돌아 오니 출발시간 30분쯤 남아있습니다.
쌀쌀한 곳에 있다 역 안의 따뜻한 곳으로 들어와서 그러는 것인지
취기가 오르기 시작합니다.

역 대합실에 진열해 놓은 화가들의 그림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리 없지만
울긋불긋 채색된 풍경속에 나들락거리다 보니
남은 시간도 부족합니다.

취기가 꽤 오르면서도 내가 내려야 하는 곳이 종착역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잠에 깊히 빠져 꿈속을 헤맨다 해도
내리지 못하고 지나칠 일은 없다는 생각에 안도를 하며
차표에 적혀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떠날 때 처럼 기차가 흔들거리기 시작하고

취기가 닳아 오를 수록무게를 더해가던눈꺼플이

흔들거림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내려 감기고 맙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흔들거릴 때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흔들거림은제자리를 다시 찾기 위한 흔들거림이어야만 하며
궤도 밖으로 아주 튀어나가는 흔들거림이어선 안 될 일입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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