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22년만의 신혼여행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9:54

( 2003년 11월 27일 목요일 )

그해 1월 17일,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떠나려는 날
폭설과 강풍으로 인해 비행기가 뜨질 못해
여행지를 다른 곳으로 바꿔서 다녀오는 길에
"제주도엔 다음에 가자"고 했던 약속을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딸 아이가 태어나고
둘째 아들녀석이 고등학교를 마치는 동안
그곳에 다녀올 계획도 몇 번 세운 적이 있었으나
어쩐 일인지 우리 부부와 그곳은 인연이 없는 듯
날씨가 방해를 하거나 아니면 돌발상황으로 인해 취소가 되풀이되곤 했습니다.

비행기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곳,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녀올 수 있는 곳임에도
22년 10개월 10일의 세월을 보낸 뒤에야 약속을 지키는 꼴이 되고 보니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무던한 사람이고
아내에겐 미안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제주에 도착해 승용차를 빌려 좋다는 곳을 물어가며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국화꽃으로 아름답게 단장해놓은 식물원도 구경을 하며
배를 타고 작은 섬으로 건너가 돌담으로 둘러쳐진 들녘도 돌아다녔습니다.

가끔은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의 사진도 찍어주고
그들의 행복해 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22년 전의 풋풋했던 나와 아내의 모습도 상상을 했습니다.

비록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중년이 되어버렸지만
따지자면 우리 또한 그들과 같은 신혼여행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한편으론 첫날 밤에 신혼부부들이
아이들은 앞으로 몇명을 낳고 어떻게 키울 것인지,
집은 언제 어떻게 장만을 할 것인지,
그런 장밋빛 그림을 그리는 일이야 말로
그들에겐 한껏 부푼 기대와 즐거움일 수 있으나,
현실로 다가오는 삶에 있어선 숱한 사연도 많을 일이라
그림을 그릴 때 화사하게 피어난 꽃을 그려넣은 다음엔
구름과 바람도 함께 그려넣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다만,
기쁘고 즐거울 때 심난한 생각을 미리 하며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 있어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잘 넘기길 바라는 건
세상을 먼저 살았다는 이유로 부리는 교만은 아닌지 또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그런 그림을 그릴 때 나 또한 그림을 그립니다.
비록 넓고 황량한 들판일지래도
하나가 아닌 두개의 나무가
서로 등 기댄 채 정겹게 서 있는 그런 그림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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