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9:55
( 2003년 12월 18일 목요일 )

가정과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당신 남편에게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겠냐"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아내에게
내 스스로 "30점만 주라"고 했던 건 바로 오늘아침의 일입니다.

간혹 부인들끼리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듣게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자식 남편자랑은 팔불출'이라는 속담을 의식해서 그러는 지는 모를 일이나
남편과 관련된 이야기의 대부분은 불만과 푸념들이고 보면
내가 요구했던 낙제점수에 불과한 30점은

겸손이 아니라 내 자신의 존재가치만이라도 인정받으려는 속셈입니다.

첫날밤 하얀 도화지에 그린 푸른 초원과 일곱색갈 무지게의 그림이
한갖 신기루에 불과하다 깨닫는 건 날을 지새고 난 다음날 아침의 일이라
그 꿈에서 깨어나 아웅다웅하며 20년 이상 살았는데도 인정을 받을 점수가 남아있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아내와 다시 살겠다는 남자들은 많지만
지금의 남편과 살겠다는 여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어떤 조사통계를 보며
처음 출발할 땐 최소한 그의 아내에게만큼은 인정을 받았을 남편들이

어떻게 해서 찬밥신세가 되어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혹시남편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또는 겉으로 보여지는 잘 나가는 어느집 남편과 비교대상은 아니었는지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살 것이냐는문제를 내게 묻고

솔직하게 대답을 하라 한다면
나 역시 쉽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내가 다 마음에 들거나 안 드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상황이냉랭한 경우만 아니라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아내와 살겠다"라 말하겠습니다.
싫든 좋든 부대끼며 함께 살아와 준 아내가 고마울 일이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는데
궂이 듣는 이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끔 아내가 남의 남편 칭찬을 할 때면
"사람은 함께 살아봐야 안다"고 주장을 하곤 합니다.
다음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거든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만나서 살아보라고 말을하곤 합니다.
이것은 나만의 뱃장이거나 협박일 수 있고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겐 마냥 너그러운 사람이
안에선 그렇지가 않은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요즈음들어 날씨만큼 마음도 함께 움추려지는 이유는
지천명의 나이를며칠 앞둔 사람이라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늙어서 홀로 찬밥이나 퍼 먹는 그런 일이나 없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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