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4, 20)
먹을거리가 없어서 가난했던 시절엔
들녘에 가득찬 보리밭에서 보리가 패는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지곤 했던 일은 아주 오랜 옛날이 아닌
보리밥에 쌀 몇톨만 섞여 있어도 부자라는 말을 듣던 불과 30여년 전의 일입니다.
요즈음엔
건강을 생각해 쌀밥에 일부러 보리 몇 톨씩 얹어 먹거나
들녘 어디를 가든 보리밭 조차 찾아 볼 수 없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산이 시작되는 양지녘 한켠에 누군가 일궈놓은 작은 보리밭,
모개가 막 패기 시작한 보리밭을 지나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발길을 멈춥니다.
누가 보는 건 아닌지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모개 하나를 꺾어서 마디 하나만을 잘라내곤
슬그머니 보리밭 속으로 던져 넣습니다.
내 어릴 적 보리밭 옆을 지날 때면 의례 했던 짓입니다.
보리밭을 한참 더 지나서 흥건히 땀이 벨 무렵
소나무 그늘아래에 앉아서 꺾어온 보릿대를 꺼냅니다.
보릿대 마디 끝 부분에 손톱으로 조심스레 실금을 그어
가느다랗게 바람이 빠져나갈 만큼의 틈새를 만든 다음에
입술에 보릿대 마디의 반대쪽을 힘주어서 물고
두볼을 한껏 부풀려서 바람을 불어 넣습니다.
삘리리~~!
맑고 고운 보리피리 소리가 산의 능선에 울려퍼집니다.
책보자기를 어깨에 가로 걸머진 코흘리게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내게 다가왔다가 보리피리 소리를 타고서 사라집니다.
언덕베기에 아지랑이 피어나는 고향의 풍경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사라집니다.
산에 온 누군가가 내가 불어대는 보리피리 소리를 듣고
나처럼 옛 생각에 물씬 잠겨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든 고향을 가슴속에 묻어놓고 사는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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