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7:11
( 2002년 10월 19일 토요일 )

지난 해 9월 하순경

백무동계곡에서 출발하여지리산 천왕봉에 올랐을때
천왕봉에서 약 100 여m 쯤까지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어
생각지도 못했던 가을풍경을 일찌감치 만났었기에
작년 가을은 어느 해보다 더 길었던 느낌이었습니다.

산으로 떠나기에 앞서

단풍이 곱게 물들었을 것만 같았던 지리산의 능선엔
10월 중순인데도 벌써 잎은 다 저버리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산이었습니다.

야산과 들녘엔만추라 하기엔 아직 이른데도
지리산 능선에서 일찍 시작된 겨울을 보고 내려왔으니
올 겨울은 작년의 가을만큼이나 길어질 것 같습니다.

산 위에선 봄과 여름이 더디게 시작되는 반면
가을과 겨울은 서둘러 오는 탓에
산에 오르다 보면 가끔씩

평지에서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볼 수 있는 행운도 있습니다.



산 능선엔 나뭇가지에 삭풍이불어대는한 겨울 풍경인데도
산 허리엔 단풍이 곱게 물들어서 가을이 한창이고
산 아랫쪽으로 내려 올 수록 아직 여름풍경 그대로이니,
세개의 계절이 층을 이뤄놓고 어우러진 광경이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하루 종일 산행을 마치고
산객들로 가득찬 대피소 안에서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가 요란스러운데
집을 떠나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습성마저떨쳐내지 못한 탓에
고단했지만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날밤을 샜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산행을 시작할 때 피곤했던 일만 빼놓고서는
산길을 걷는 동안
늦게 피어나 아직 지지않은 들꽃들과
형형색색으로 익은 채 매달려 있는 이름모를 열매들,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펼쳐진 능선의 아름다운 풍경들과
춥지도 덥지도 않은 맑고 상쾌한 바람까지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와 닿지 않은 게 없어서
보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모두 담아오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심난하고 버거운 일들을 접할 때에도
산에서 만끽했던 상쾌한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산다면
세상사 근심걱정 하나 없이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선경에 흠뻑 취해있을 땐
내가 마치 신선이라도 되어있는 착각도 들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을 땐
파도처럼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다시 발을 서두르는 걸 보면
나는 결코 선경에 노니는 신선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와선 살 수 없는 하차잖은 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신선으로 사는 게 외로울 일이라면

차라리 인간으로 세상을 살면서

삶이 지루하거나 버거움이 느껴질 때면

홀연히 산으로 떠나와

신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어 볼만한일이라 여깁니다.

늦은 시간에 돌아와
산에서 자지 못했던 잠까지 다 자고 아침을 맞으니
돌아 와 마음편히 누울 곳이 있다는 사실에
내보금자리의 소중함이 새삼스럽습니다.


산 능선으로 부터 이미 시작된 겨울에 밀려
단풍으로 곱게 물든 잎들도 쫓기는 듯 지겠지요.
하루하루가 늘 즐겁고 보람된 나날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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