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장서서 바위의 맞은편 쪽으로 가로질러 건널 때
얼음은 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 했었다.
어느 한 순간,
낭떠러지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느낌도 잠시 뿐
까마득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파리가 들끓던 시절엔
직사각형으로 길게자른 종이를 중천장에 나풀거리게 붙여놓곤했었다.
녀석들이 방안 아무데나 일을 치뤄 지저분해지는 걸 막아보겠다는 심사다.
몽롱한 의식속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중천장에 붙어 나불거리던 종이꼬리들이 시야에 가득 채워졌다.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는 것인지.
내 주변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이들은 또 누구인지.......
....
..........
시간이 좀 더 지난 뒤엔
눈물 범벅이 되신 어머님의 놀란 얼굴도 보이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산집의 당숙 당숙모님, 그리고 두 친구들도 보였다.
6촌이면서 생일이 나 보다 넉달이 빨라
그로부터 몇 년 후부터는 형이라 불렀어야 했던 친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 기억을 더듬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준다.
셋이서 산 중턱에 있는 검바위에 올라갔으며
내가 그곳 바위를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가려다 얼음에 미끄러져 절벽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과
함께 간 두 친구가 산집까지 업고 내려 와 눕혀 놓았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희미하게나마 내가 친구들과 셋이서 감방산에 올라갔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피로 흥건하게 적신 베게와 머리맡에 올려진 물수건을 걷어내고
나를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눈빛들을 의식하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여기저기를 살폈다.
떨어지는 그 순간에 바위의 작은 모서리라도 붙잡으려 했는지 손톱이 찢겨지고
무릅과 장단지 등에 무언가에 스친 상처와
누군가가 된장을 붙여놓은 머리가 조금씩 쓰리고 아플뿐
몸을 움직이는데는 전혀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30여분 쯤후 자리에서 일어나
산집으로 부터 3~4백여m 떨어져 있는 집까지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내 발로걸어서 돌아왔다.
검바위에서 떨어지고서도
머리가 조금 깨진 것 말고는 사지가 멀쩡한 채 제 발로 걸어서 집에 돌아 온 사건을 두고
한 동안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이웃마을까지 적잖은 화잿거리가 되었으니
지금으로 부터 37년 전의 일이다.
- 1975년 이른 봄날 감방산과 내 고향-
고향마을 동쪽으로 능선을 길게 늘어뜨린 채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르는 해발 200m도 채 되지 않은 얕으막한 감방산은
봄이면 유채꽃으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들녘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소풍하기에 좋고
여름이면 학교에서 돌아 온 아이들이 소를 풀어놓고 해가 바다로 질 때까지 맘껏 뛰어놀았다.
가을무렵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엔 떨어진 솔잎을 긁으러 머슴들이 지게를 지고 달음박질 치거나
눈쌓인 겨울날이면 동네 청년들이 토끼몰이를 하느라 왁자지껄했던,
사계절 내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삶의 애환과 추억거리가 베어있는 감방산의 허리춤엔
가파르게 경사 진 큼지막한 바위가 터줏대감인냥 들어앉아 있다.
검바위라 하면 큰 칼을 닮아서 그렇게 부를 거라 생각하기 쉬우나
이 바위의 어디를 봐도 검을 닮은 곳이라곤 없다.
동네 어르신들한테 검바위라 부르게 된 유래를 여쭤봤으나
이해될만한 대답같은 건 들어보질 못했다.
추측컨데 오랜 세월동안 바위를 적시며 조금씩 흘러내리는 물로 인해 바위의 표면이 검게 착색되어
멀리서 보면 마치 검은색 바위처럼 보여서 검은바위 또는 검바위라 불렀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 검바위에서 내려다 본 내 고향 -
평소 감방산엔 갈퀴나무를 하러 오는 머슴들과 소 풀을 뜯기러 오는 아이들이
자주 나들락거리긴 해도
검바위까지 오르는 건 추석무렵 동네아이들이 화약총을 가지고 올라와
굉음을 터뜨리며 놀때 말고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날 친구들과 검바위에 올랐던 것도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
할 일도 없어 심심하니 예전에 놀던 곳에나 가보자는 심사였다.
산으로 향하면서 혹시나 산토끼라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각자 작대기까지 챙겨서 올라갔다가
산토끼는 커녕바위에서 추락해 실신을 한 나를 업고 산을 내려와야만했던 친구는
얼마나 놀랐을까?
6촌 형제지간인 그와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고민많던 청년시절까지
서숙대로 얽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단 한번도 다툼같은 건 해보지 않았던 이웃이자 친구이자 사이좋은 형제였다.
무료할 때마다 서로에게 더없이 좋은 벗이었던 그가
중동 어느 나라로 돈을 벌러 떠난 사이에
나 또한 재미도 희망도 없는 농촌생활의 뜻을접고 고향을 떠나왔다.
그로부터 2년 쯤 지난 어느날
중동으로 떠났던 그가 불쑥 직장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서 직장일 제쳐두고 술이라도 함께 마시련만
직장에서 눈치를 살펴야만 했던 새내기라서 그럴수도 없는 처지였다.
결국 책상에 마주 앉아 커피 한 잔으로 대신 할 때
"네가 고향에 남아 있었다면 벌어 온 돈으로 땅을 사서 함께 농사를 지으려 했다"며
무척이나 허전해 하던 표정이 30년이 지난 지끔까지도 눈에 선하다.
만약 그 일이 그와 단 둘이서 마주앉는 마지막의 일일 줄 미리 알았다면
그리 서운하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 객지에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집안에 일이 있을 때 잠깐씩이나마 만날 수는 있었으나
예전처럼 서로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술 한 잔 편하게 마실 여유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 친구 딸아이의 돌 무렵이었던 것 같다.
직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막 쉬려던 참이다.
주인아주머니로 부터 전화 받으라는 부름에 아랫층으로 허겁지겁 뛰어내려 갔다.
그 때만 해도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전화같은 건생각지도 않을 때였다.
어머니한테서 온 전화였다.
"동구가 직장에서 일을하다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기지도 못하고 죽었단다"
"...................."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까만 먹물로 가득 채워지는가 싶더니
고향에서 나와 함께 하고자 했던 꿈을 나 때문에 버려야만 했다는 생각에
내가 죽는날까지 미안해 하며 살아야 한다는.........
착찹하고 허탈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었다.
- 1975년 내 친구이자 6촌 형(사진의 왼쪽)과 -
그는
감기 한 번 앓지 않았던 참으로 건강했던 사람이었다.
운동회 때는 반 대표로 축구선수로 뽑힐만큼 운동도 잘 했던 사람이었다.
가까이에서 내 가픈 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건강을 걱정해주던 그런 사람이었다.
검바위에서 추락했을 때 산아래 산집까지 나를 등에 없고 내려 온 그는
나에게 형이라는 소리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못하고
스물 아홉이 되던 해에 홀연히 떠나갔다.
참 이상할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서로 얼굴 한 번 붉혀 본 적이 없는 이가 그렇게 훌쩍 떠났고,
나와 아내를 맺어 준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가더니,
항상 가까이에 붙어살던 녀석도 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떠났다.
내 삶에 있어 더없이 좋은 인연이라 여겼던 이들이
왜 한결같이 그렇게 훌쩍 떠나버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가끔은 내 삶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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