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지리산 9차종주산행기(2011)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11. 10. 13. 23:20

하루 또 하루를 살면서 가끔씩 속세를 떠나고 싶어지는 건 세상살이가 버겁거나 심사가 불편해서가 아니다.

잠시의 일탈이 또 다른 날들을 살아감에 있어 청량제가 되어준다면 홀연히 떠나볼만 하다는 평소의 생각때문이다.

 


하지만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했던가?

짧은 외출이었지만 집에 돌아오니 마음부터 편안하다.

안락함....

집이란 그래서 좋은 것이다.

몸이 몹시 무거워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누웠다.

 

헌데 긴장이 스르륵 풀리는 듯 싶으면서도 정신이 되레 초롱초롱해지는 건 무슨 이유인가?.

아직도 무언가 거슬림이 남아 있는 것도아니고 그렇다고 잠시의 일탈에 대한 여운이 있어서도 아니라면 쉽지않았던 행사 하나를 무사히 치뤄냈다는 안도감에 기분이 상기 탓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으로 부터 넉 달 전인 지난 6월에 그랬듯이 아내는 내 친구 복영이와 나를 성삼재에 내려주고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길을 되돌아 갔다.

 

고생을 각오한 일이라면 산의 초입까지 가거나 하산하여 돌아오는 일까지도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조금 편하자고 꼭두새벽에 먼길을 배웅케 하고 다시 먼곳까지 마중오라는 건 염치없고 미안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별빛 쏟아지는 성삼재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새벽빛이 고운 노고단재를 지나 임걸령에서 물통에 물을 채우고 반야봉으로 가는 노루목 삼거리를 지나 삼도봉에 올라서서 걸어 온 길을 뒤돌아 본다.

 

 


가야 할 곳은 아스라이 높은 곳에 있음에도 힘들게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면서 크나큰 손해를 보는 느낌의 화개재를 지나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가야 하는 토끼봉과 산길 옆 능선너머에 총각샘이 있는 명선봉을 오를 때면 두 다리가 힘에 부치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이런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그리고 다시는 이런 짓을 되풀이하지 않겠노라는 다짐도 이번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연하천대피소 마당 앞으로 흐르는 시원한 물에 목을 축이고 형제봉 구간을 오르락 내리락거리다 벽소령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지쳤다.

점심때라 대피소에 산객들로 붐빌 줄 알았으나 평일이라서 그런지 인적조차 없고 무거운 정적만 가득하다.

아내가 준비해 준 김치김밥을 먹고 탁자에 누웠다..

이럴 때 잠깐의 토막잠이라도 잔다면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어질 것 같으나 올 때마다 가장 힘들어 했던 구간인 세석까지 갈 일을 생각하니 잠시라도 마음편하게 누워있을 수가 없다.

 

 


평지에선 크게 의식하지 않았으나 산길에선 등에 짊어진 짐보다 뱃속에 담은게 훨씬 더 힘들게 한다.

그래서 가능한 봉우리의 꼭데기에서 먹고 나서 아래로 걸어야만 고생을 더는 지름길인데도 힘든 구간을 두고 점심을 먹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다.

지난 6월에 왔을 때 친구 복영이 보다 내가 더 힘겨워 했던 이유도 바로 두꺼운 뱃살때문이 아니었던가?

 

 

거리상으로 세석까지는 세 시간 남짓 걸으면 되는 구간이긴 해도 선비샘이 있는 덕평봉과 산길이 거칠고 경사진 영신봉을 지나는 동안엔 조급하게 맘먹고 걸었다간 낭패를 보기쉽상이다.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은 선비샘이 무척이나 반갑고 고맙다.

지리산이 걸어 볼만 한 산이라 여겨지는 이유도 요소요소에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신봉을 눈앞에 두니 부담스럽긴 해도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다.

더구나 세석이 그 너머에 있고 해가 질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이나 남았으니 조급해 하거나 주저할 일은 아니다.

열 한 시간만에 도착한 세석대피소엔 여느때 같으면 등산객으로 북적일텐데 평일의 한산한 분위기가 오히려 좋다.

지난 6월에 왔을 때보다 지치지는 않았으나 오늘은 그만 걸어도 된다는 생각때문인지 피곤함이 물밀듯 밀려온다.

이럴 땐 일찌감치 자릴 잡고 눕는 게 상책이다.

 

 


 

촛대봉 능선 위로 둥근 달이 불쑥 치솟아 오른다.

모르긴 해도 달의 모양새로 봐서 내일쯤이 보름일 것 같다.

미리 예상을 하고 귀마개를 챙겨오긴 했어도 지친 산객들의 코고는 소리를 다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녹초가 되어 잠에 취하지 않는 한 초저녁부터 누워 동이 틀 때까지 하룻밤을 지새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아침에 촛대봉에서 일출을 맞으려던 계획도, 산 아래로 펼쳐진 운해바다를 볼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도, 먹구름이 꽉찬 새벽하늘을 보면서 마음을 비웠다.

 

 


 

이럴 땐 미련같은 건 훌훌 털어내고 남아있는 길을 부지런히 걸으면 되는 것이다.

연하봉 구간을 걷는 동안 맑은 햇살이 비추는 아름다운 선경을 보지 못해 아쉬웠으나 하늘이 하는 일에 집착할 건 아니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구절초와 산오이풀이 어우러진 제석봉을 상상했으나 이미 오래전에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다 끝낸 광경이다.

시간은 나를 위해서 잠시도 머물러주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통천문에서 부터 급한 경사를 천왕봉의 마력에 끌려가는듯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단숨에 치고 올라선다.

그리고 가슴속 깊은 곳까지 천왕봉의 기운을 다 채워넣는다.

 

 


 

내가 선 곳이 바로 천왕봉임을 깨닫는 그 순간부터 멀리 뾰족하게 솟은 노고단에서 시작하여 내가 걸어왔던 산 능선들을 따라 구불구불 선을 긋는다.

아스라이 먼 길을 순전히 내 두 발로 걸어서 왔다는사실에 스스로 대견스럽다.

그런 느낌은 맨 처음 천왕봉을 딛고 설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내 남은 생에 있어 몇 번이나 다시 올 수 있을런지 모를 일이나 수 십 번을 더 온다한들 초연한 듯 무덤덤해 할수가 있을까?

 

 

 


 

손에 쥔 건 없어도 가슴엔 맑은 기운으로 꽉 채워진 느낌이라서 이 이상 더 바랄 게 없다.

힘들어 하면서도 이곳에 오는 가장 큰 이유이자 목적이기도 하다.

이 느낌 이대로 일상으로 다시 돌아 간다면 얼마동안은 잡념없이도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곧장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먹구름에 닫혀있던 하늘이 가을바람에 서서히 열리고 홀로 남은 표지석이 배웅을 한다.

어느날 갑자기 또 다시 마음이 앞서서 길을 나서거든 일상의 잡다한 것들에 얽메이지 말고 훌훌 털어버리고 길을 따라 나서라며......

 

2011, 10/10 ~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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