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서리 하얗게 내리는 날은 물론이고함박눈이 소복히 쌓이던 날에도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이면
꿈결인 듯 가물가물 들려오는 맑고 가느다란 종소리에 잠을 깨곤 했습니다.
뗑그렁 뗑그렁.......
종소리가 대문밖까지 다가오길 기다리시던 어머니께선
양푼을 들고 나가셔서 두부 몇 모씩 받아오곤 하셨습니다.
그 시절 두부장수가 겨울 한 철에만 지나다녔던 건
바쁜 농사철엔 손이 많이 가는 두부를 만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겨울철 말고는 보관하는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명절이나제사때면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오던 탕국이 생각납니다.
나는 식성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음에도
부드러운 두부와 굴만 쏙쏙 건져먹고선
국물과 질긴 명태포는 아버지께 내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는 물지게를 진 두부장수의 모습을 딱 한 번 밖에 본 적이 없습니다.
함박눈이 소복히 내려쌓여 있던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습니다.
마당에 쌓인 눈을 쓰시던 아버지를 따라 가래를 들고 장난을 치고 있을 때
두부장수의 종소리를 듣고 나오셨던 어머니를 따라 대문밖으로 나섰습니다.
이른 아침이라서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눈길을 헤치며
양쪽 귀를 두툼하게 감싼 털모자를 깊게 눌러 쓴 채 물지게를지고 가까이 다가오는
두부장수의 거무튀튀한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그만 어머니의 치맛폭에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부장수 아저씨께선 그런 나를 보면서
어머니에게 "꼬맹이가 잠도 없수다"라며 물동이에서 두부를 꺼내 양푼에 담아 주고선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멀어져 가던 모습은
두부를 먹을 때마다 떠오르곤 하는 추억속에 새겨져 있는멋진그림입니다.
그로 부터 몇 년 후 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십여리 학교길의 중간쯤에 있는 바닷가의 오두막집이
바로 그 두부장수 아저씨네 집이라는 사실과
625전쟁때 북에서 피난을 왔다고 해서 피난민이라 부른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고향을 떠나 올 때까지
겨울날 아침이면 가끔씩 들려오곤 했던 종소리가
바로 그 피난민 아저씨의 종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며칠 전 남녘의 한 작은 읍내로 출장갈 때의 일입니다.
평소 출장을 가려면 하루나 이틀 전에 미리 약속을 해 두는 게 예의이긴 하나
이날은 계획된 일이 아니라서 내려가는 길에 전화를 걸어서 양해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두 시간 남짓 걸려서 도착해 보니
콘크리트 담벽에 "ㅇㅇ두부"라는 검정색 페인트 글씨가 퇴색된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허름한 건물을 한 바퀴 돌아봐도 인적은 커녕 녹슨 철문까지 굳게 닫혀져 있어
혹시 공장이 딴 곳으로 옮겨간 건 아닐까 싶어 출발할 때 통화했던 이에게 전화를 하니
바로 그 건물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철문이 스르륵 열립니다.
두부공장의 유일한 종업원이자 사장이라는 이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허름하고 오래된 기계들이 정치된 채 적막에 휩쌓여 있는 풍경이
나를 당혹스럽게만듭니다.
며칠 전 시내의 두부공장에 갔을 때
종업원들이 위생복을 입고 분주히 오가던 광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서
오늘은 쉬는 날이냐고 물었습니다.
"요즘엔 큰 공장에서 두부를 만들어 지방까지 공급을 하는 터라
나는 이틀에 한 시간씩 두부를 만들어 이틀간 파는 실정"이라며
물탱크에 담가놓은 10여 판 남짓의 두부를 가르킵니다.
나는 지금껏 물지게를 지고 눈쌓인 길을 걸어가는 두부장수와
귓가에 맴도는 맑은 종소리만 그리고 있었지
이른 새벽녘 눈길에서 고무신을 신었던 두부장수의 발은 얼마나 시렸을까에 대해선
단 한 번이라도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는 또 한 사람의 두부장수를 보는 순간
내 어릴적 고향집 대문앞을 지나 다니시던 피난민 두부장수의 삶이야 말로
무척이나 고단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마치못할 짓을 한 것처럼 죄송스럽고숙연해 짐을 느낍니다.
어쩌면 올 안에 문을 닫을 지도 모르겠다는 씁쓰레한 표정의 두부장수.....
추억속의 빛바랜 그림과 함께
또 한 장의 두부장수 그림이 내 가슴속에 새겨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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