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지만 평화로운 농촌에서 태어나
적잖은 세월을 그곳에서 자랐던 까닭에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내면적인 정서는
풋풋한 흙냄새와 함께 자랐던 동무들의 순박한 얼굴들과
계절에 따라 바뀌곤 하는 들녘의 풍경으로 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네.
그래선지 세상살이가 고단하게 느껴질 때면
비바람 부는 날엔 망가지기 쉽상인 비닐우산 보다는
USA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마다리포대를 함께 둘러 쓸 줄 알고,
책보자기에싸 온 삶은 고구마를몰래 나눠 먹기도 하며,
냄새는 구수하나 맛은 별로였던 옥수수죽을 타먹으라며
나 보다 더 가난한 친구에게 도시락 뚜겅을 내어주던 친구들과,
책상에 금을 긋고 자리싸움 해대던 짖굳은 친구의 모습들까지도
애틋한 그리움으로 다가오곤 할 때가 많았네.
더구나 한 교실에서 6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었기에
그 시절 또렸하게 새겨진 이야기들은
40년이 훌쩍 지날 때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어,
추억거리를 이야기 할 때면
그때 이야기를 먼저 꺼내곤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네.
남여 학생을 한 책걸상에 앉히려는 선생님의 첫 시도에
한 녀석이 겁없이 반항을 했다가 본보기로 죽을만큼 얻어 터질 때가 5학년 때였으니
자네와 내가 짝꿍이 되었던건 그 이후의 일이었겠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네가 한 때나마 내 짝궁이었다는 사실 외엔
언제 얼마동안 한 책걸상에 함께 앉아 지냈었고
또 그러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내 기억속을더듬거려 봐도 잡혀지는 게 하나도 없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자네나 나나 있는 듯 없는 듯하며 친구들 틈새에 묻혀지냈기 때문이었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웃으며 회상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이유야 어쨌든 아쉬울 일이 아닐 수 없네.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35년이 지나가던 지금으로 부터 7년 전,
옛 친구들을 수소문하여한 명 또 한 명씩불러 모을 무렵,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자넬 처음으로 만나
친구들과 함께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며옛 이야기들을 되새김질 하다
새날이 밝아 올 때야잠자리에 쓰려졌던 게
내 짝꿍과 얽힌 유일한 추억거리일세.
나는 그 때 그곳에서자네에게 새 이름을 지어 바꿔부르기 시작했었지.
"내 짝꿍꽃순이"......
부끄러움 많던 사람도 세상에 묻혀살며 나이가 드니
없던 넉살도 제법 생겨나는 것 같네.
바로 어제 동창회가 있었던 모교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40여 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선
그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었네.
몇 년 전부터친구들 자녀 결혼식에 쫓아다니기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가 벌써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친구들로 부터 손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도 이제 늙어간다는 현실이 착찹함으로 먼저 다가오네.
그러나한편으론
시간의 흐름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것이라서
되새김질 하거나 되돌아가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것 보다는,
친구들과서로 늙어가는 모습이라도자주 보며 사는 것이
더 괜찮을 일이 아닐까 싶네.
오늘 아침,
어제 동창회에서 담아 온 사진을 정리하며
아내에게 자네와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니
"짝꿍이미인이시네요"라고 하더구먼.
국민학교 여자친구들에겐 언제나 관대한 아내지만
행여라도잔잔한 심사에 작은 파문이라도 일어날까봐
"이 친구는 사진발이잘 받는것 같다"며 웃고 말았네.
영단, 경순, 미경, 정희 대신
내가 붙여 준 이름 꽃순이, 꽃님이, 꽃분이, 꽃례.....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엔 언제나 이 친구들이모두 함께 할 수 있길 바래며,
모초롬 가족들과 함께 한 나들이에
고향의 정과 친구들의 우정도듬뿍 챙겨가시게.
늘 건강하시게나.
2009, 4, 26, 짝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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