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들녘에서(6, 보릿고개)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8. 5. 21. 13:20

용재가 그의 집안 이야기를 스스로 먼저 꺼내지 않는 한
내가 먼저 꺼내는 일은 다시는 하지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보리밟기, 고구마 종자심기, 논갈이, 못자리 준비 등
바쁘게 농사준비를 하는 동안

들녘은차츰 봄빛으로 물씬 베어가고 있었다.


양지쪽에 피어났던 할미꽃이 하얗게 머리를 풀어헤치고
온 산이 활활 타오르듯피어난 진달래가 봄비에 쫓겨가듯 지고 난 다음엔
철쭉이 빨갛게 야산을 물들였다.

추운 겨울 삭풍을 견뎌내고 피어난 꽃의 의미로 볼때
언제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진달래만큼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실낱같이 가느다란 향기로 맘 설레게 하는 그런 꽃이 또 어디 있으랴만,
예쁘기로만 말하면 잎이 없이 피는 진달래보다
초록색 잎사귀와 어우러진 빨간 철쭉이 더 곱고 예쁘다.

철쭉이 곱게 필 무렵이면
하룻밤 봄비에 쑥 자라난 보리가 모가지를쏙쏙 뽑아 올리고
유채는 기다란꽃대 아래에서부터톡톡 꽃망울을 터뜨리는 듯 싶더니
어느새 들녘 온 천지가 원색의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한데
바다 쪽에서 불어대는 바람결에 유채꽃향기가 코를 물씬 적시고 간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날아왔는지
꿀벌들이 노란 유채꽃가루를 온 몸에 흠뻑 뒤집어 쓴 채로
꿀을 따느라 윙윙거리는 날갯짓소리가 가득한 날 들녘을 거닐다 보면
거무스름한 얼굴까지도 노랗게 물이 들고 만다.

어릴 적 우물 안의 개구리시절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줄로 알았던

해발 200m도 채 안 되는 감방산의중턱에만 올라가도

한 눈에내려다 보이는 들녘의 풍경은

어느 유명한 화가가 그려놓은 아름다운 수채화가 어디 이만할까?

노랑 물감을 쏟아놓은 듯한 유체밭과 겨우내 비어놓은 빨간 황토밭과 ,

온갖 모양새를 갖춘 조각들을빈틈없이 짜맞춰놓은것 처럼 보이는 다랭이논과,

저 멀리파란바다에 일렁이는 하얀 파도와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 가는 뭉게구름이 한데 어우러진 들녘에서

누군가가 불어대는 맑디맑은 보리피리가 정겹기만 하다.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평화롭기는 하나
배고플 때허기를 달래주던고구마도 종자로 땅에 묻고
독 안의 식량까지도 바닥을 드러내는때를 맞춰 보리가 패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배가 고픈보릿고개다.

기나긴 식민지 시절과 전쟁을 겪으며 지나온 아버지 시절

초근목피로 끼니를 연명했다던 그런 시절에 비하면
못 견딜 만큼 어려움은 아니겠지만,
보리배기, 모내기 할 때 일로 대신 해 주겠다며
품삯으로 쌀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있는걸 보면
지금도 어렵고 배고플 때 인 것 만큼은 틀림이 없다.

용재가 소에게 받쳐 논둑아래 수렁에 빠진 그 뒤부터
방어용으로 항상 큼지막한 대나무 회초리를 들고 다니기는 했어도
지성스럽게 매일 소를 끌고 나가서 풀을 뜯기곤 하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논과 밭 갈이를 할 때 없어선 안 될

전 재산이라고 해도 괜찮을 소 한 마리를 거두는 일을

용재한테 맏길 수 있어소 먹일 걱정 하나는 덜 수 있었다.

어둠이내릴무렵 들일을 마치고 집 대문을 막 들어 설 때
외양간에서 얼굴을 온통 숯검뎅이로 분칠을하고
불쑥나오는 시커먼 그림자가 있어화들짝 놀라서 보니
뭔가 입안 가득넣고 오물오물 씹고 있는 용재다.

외양간 아궁이에서 뭘 하느라고 그렇게 시커멓게 분칠을 했는지
집안에서 풍기는 구수한 냄새로 쉽게 짐작 할 수가 있었지만
녀석이 난처해 할까봐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녀석의 등을 떠 밀어서 기둥에 걸어둔 거울에얼굴을 비춰주니
부끄러운 듯이 샘으로 잽싸게 달려가 얼굴을 씻는다.

짐작컨데,
소에게 풀을 뜯기로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몰래 꺾어온 보리모개를

외양간 아궁이에서그을려 먹느라 정신이 팔려
얼굴이 그렇게까지 된 줄도 몰랐었나 보다.

"야! 맛있는 것을 너 혼자만 먹을래?
내일부터 너 혼자먹으면 보리밭 주인한테 일러 바칠테니깐 알아서 혀!"
배가 고파서 먹고 싶다는 생각보다
녀석이 당황해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예전에 구워서 먹는 풋보리의 구수한 맛이 생각이 나서
내 스스로 녀석과 공범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다음 날부터
용재가 바지 주머니 두툼하게 보리모개를 꺾어오는 날이면
외양간 아궁이에서 함께 구워 먹기도 하면서
검뎅이로 시컴해진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킥킥거리다 보니
두 사람의 사이에 있던 마음의벽도 차츰 허물어지고
나도 함께 어린아이가 되는 듯한 느낌이다.

이 녀석과 하루를 함께 살더라도

마음 부치고 살게 해 주려는이유는

언덕빼기 보리밭에서'피난민'아버지에대한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가엾은녀석에게 내가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 마다 애틋하게 그리는 고향을 마음속에 보듬은 채 살아간다.

아주 어릴적남의 집 아랫방에서 살았다는 그 곳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이 있는오막살이 집을 지척에 두고서도

가고 싶다는 말 한마디하지않는 것을 보면

녀석이마음에두고있는고향은 어디일까?

밤이 깊어갈 수록요란해 지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새벽이 올 때까지 계속되겠지만

외양간에암소의 되새김질은 또 언제 그칠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든 말든

이불을칭칭 감은 채 꿈속에서중얼거리는녀석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