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아버지께선 들 일이 없는 겨울철이면
곡식 담는데 없어선안 될 짚 가마니를
하루도 빠짐없이짜시곤 하셨다.
가마니를 짜는 일은
반드시 두 사람이 함께 해야만 가능한일이라서
두 분 중에 한 분이라도 밖에서 봐야 할 일이 있을 땐
부득히 그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으셨다.
그럼에도가끔씩은가마니 짜는 일에 무료하셨던 아버지께서
배짱 좋게도어머니 몰래 동네 마실을 가셔서
친구들과 하루종일 놀다가 얼큰하게 취해서 돌아오곤 하셨는데
어머니의 불평을 다 받아드릴각오는 미리 하고 그러셨는지는 모르겠다.
어머니께서평소에 살림하시는 것으로 비춰볼 때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하루는커녕 한나절도 그냥 보내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피난민의 아들' 용재가 가마니틀 옆에 앉아서
씨실을 바늘대로 넣는 어머니의손놀림에따라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대다가
아버지의 보두질에 맞춰서 또다시 고개를 위 아래로 따라 흔드는 모습이
마치늦둥이 아들녀석이 재롱떠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가마니 짜는데 필요한 짚이라도 손질해서 챙겨드려야 겠다 싶어서
벼늘에서 빼낸 짚 몇 단을 떡메로 두들기고
껍질을 대충 벗겨 가지런히 해서 열 단쯤 묶는 동안
그것도 일이라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숨이 거칠어 진다.
용재가 언제 따라 나왔는지 재미있는 듯 구경하다가
내 눈과 마주치자 어색했던지
가마니를 짜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기에 불러 세웠다.
"야! 심심한데 뭐 할 일없겠냐?"
그냥 말이라도 걸어보려는 심사였는데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논에 가면 고기를 잡을 수 있을건디.......'
"이 한 겨울에 논에 무슨 고기가 있어? 한번 가 볼래?"
그것도 모르냐는 듯 실실 웃으며
헛간에 있는 삽과 구덕을 들고 따라오라는 듯 앞장을 선다.
논엔 벼가 잘려나간 포기만 듬성듬성 눈 위로 내 보일 뿐
눈 덮인 논 그 어디에도 고기가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도
논둑을 타고 한참동안 여기저기 좋은 자리라도 찾는 듯 싶더니만
송사리 한 마리 보이지 않은 물꼬아래 작은 웅덩이
그곳에 고인 물을 삽으로 품어내기 시작한다.
발이 시린 건 둘째로 치고
하는 짓이 시원찮아괜히 나왔다 싶어서그냥 돌아가자고 하려던 찰라,
녀석은 덤불 속에서 손바닥만한 붕어를 잡아내고
뻘을 헤집을 때마다 뱃살이 노르스름한 미꾸라지가 꿈틀거리니
내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물꼬를 열 개는 더 뒤지고 다니는 동안
고무신과 양말은흥건히 젖은 지 오래고
손발이 시려 깨질 듯이 아프고 얼굴은진흙 팩을 한 듯 엉망이었지만
엄동설한에 붕어 미꾸라지 잡는 재미가 쏠쏠해
그 정도는얼마든지 더참아 낼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잡아 온 붕어를 손질하여가마솥에 넣고
아궁이에장작불을 지펴 끓이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때를 맞춰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 술판을 벌어졌다.
가마니도 못 짜고 막걸리 몇 주전자가 순식간에 거덜났음에도
어머니의 표정이 밝으신 걸보니
가마니 짜는 일에 방해되지나 않았는지조마조마 했던마음이 퍽이나다행스럽다.
다만, 뱃살이 노르스름한 미꾸라지는
큼지막한 물 항아리에 넣어놓았다가
그 다음 날 무 배추 시래기 넣고 간을 잘 맞춰 끓여 놓고서
한 이틀끼니때마다 식구들끼리만 먹는 추어탕이
더 없이 좋은밥반찬이었다.
따스한 햇살에 초가지붕에 쌓였던 눈이 녹아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린고드름을 타고 흘러내리는 날,
용재가 햇볕 잘 드는 토방에 앉아서 예리한 송곳으로
노란 콩알 가운데를 조심스레 파내고 있다.
평소 하는 짓으로 봐서 뭔가 심심풀이로 하는 짓은 아닌 것 같아서
유심히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노끈으로 정성스레 묶은 종이뭉치를 풀어
하얀 가루를 조심스레 콩의 구멍 속에 넣고는 촛물을 녹여 바른다.
그게 뭐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콩 속에 들어간 것은 싸이나(청산가리)이며,
초를 녹여서 바르는 이유는
꿩이 먹으면 몸 속의 열로 초가 녹고
독이 몸 속으로 퍼져 꿩이 죽는다며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듣고 생각하니 그럴 듯 하다고 하면서도
꿩이 그렇게 호락호락 잡혀줄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야! 꿩이 너를 잡겠다 이 녀석아!"며비웃는 내게
두고 보라는 듯한 표정으로나를 바라본다.
어디서 독약을 구했고 그런 것을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만든 콩알을 꿩이 잘 내려온다는 솔밭 양지쪽 쌓인 눈을 걷어낸 자리마다
솔 껍질을 접시 삼아콩알을 올려놓았다는데,
매일 이른 아침과 해질녘에 그곳으로 가 보는 듯 싶었으나
꿩을 잡았다며내게 보이거나 집에 가져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틈틈이 그런 콩을 더 만들어서
지성스럽게도 산을 오르내리는 아이에게
나 또한 콩알 몇 개가 없어졌는지
꿩이 죽었는지 또는 비둘기가 죽었는지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지만
한가할 때 으레 생기는 잡념과 번뇌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뭔가를 해야만 하는데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없다.
만약지금 내 곁에 이 아이마저 없다면
하루하루의 날들은 얼마나 지루할까?
마음의 공허함을 어떻게 채울까?
바람만 부는 텅~빈 들녘이 얼마나 더 삭막할까?
들녘에 쌓였던 눈이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먼 산에 아지랑이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어느 날,
녀석은 산엘 다녀 오면서꿩 대신할미꽃 몇 송이를 가져와
물병에꼽아 책상의 호롱불등잔 옆에 나란히 올려놓는다.
봄은,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을 타고
들녘에 서 있는 우리 두 사람 곁으로
알게 모르게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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