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들녘에서(2, 가난, 고난, 심난)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8. 5. 21. 08:27

논 밭떼기나 있으면서 상머슴을 둘씩이나 들이고 농사일을 했던 우리집이
처음부터 그렇게 전답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형제는 단 두분이셨는데
큰집에서 분가를 하면서 할아버님 몫으로 받아 나온 것은
지금 살고있는 집터와 그 옆에 붙어있는 자투리 텃밭이 전부였다고 한다.

제법 부농이었던 큰집에서 빈털터리로 쫓겨나듯 분가를 한 것은
내 할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이라는 것 말고도
가난한 집으로 양자를 가시게 된 것이 그 이유라는데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라서

당시의상황을 어머니로 부터 전해 들었을 뿐이다.

내 어머니께선 한의원을 하시던아버지 덕분에큰 고생을 모르고 사시다가

농사를 짓고 살면서도 농사를 지을 땅이 없던 가난한 집에 시집을 오신 터라
땅에 대한 집착이크실 수밖에 없던 건 당연한 일이다.

외할아버지께서받은폐물을 모두 팔아
야산 두 마지기를 사서 농토로 일궈
소원처럼 바래던당신 땅에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그 이후헐벗고 굶주림의 고통을 감내하며전답을 마련하여
동네사람들 모두 부러워 할 만큼 살림을 일으켜 세우셨다고 한다.

그 덕분에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되고
그 이듬해 보릿고개 때엔
보리밥에 흰쌀이 섞인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던 사람이두 세명중에

내가 그 안에 끼어 있었으니

부모님 덕분에견딜 수 없을 만큼의배고픔은 모르고 살았던셈이다.

그러나 내가 도시의 중학교 입학시험에 겨우 턱걸이해서
자취생활을 시작한지 8여년동안
세상을 뜨신 할아버지 할머니의3년상을 각각 치뤄내시고,
삼촌과 고모, 그리고내 일곱 형제 중에세사람 등
모두여섯 명의 결혼과 분가를 시키다 보니
이 과정에서애를 써서 모으셨던 전답도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

그 시절이내 부모님에겐 고난의 세월이었던 셈이다.

남은 전답으로 굳이 머슴을 들여서 농사를 지을 만큼은 아니었기에
가을걷이가 다 끝난 뒤에는 내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어머님께서 그 동안의 고생 때문인지
몸이쇄약해예전처럼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게 더 큰 문제였다.

자식된 입장에서 집안이 어렵게 기울어가는 걸지켜보면서도

애써 눈감고 몇 해를 버텼으나
어머님의 건강은 내가 더 이상 버티며 모른 채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치를 않았기에귀향이라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방하나 덜렁 챙겨 가지고 내려온 내 모습에
마치 죄라도 지은양 바라보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빛을
모른 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애써 태연해했지만
마음은 착잡하고 심난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싫건 좋건 아이가 먼저 차지하고 있던

예전 머슴들이 쓰던 외양간이 딸려있는 사랑방에
가방을 풀었다.

어머니께서 다리밑에서 주어왔다는 조그마한 아이가 누구이며
어떻게 우리집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몇 살이며 이름이 뭔지 아는 것이 급한 건아니다.
"너! 네 방에서 함께 살아야 하겠는데 괜찮지?"라고 말은 했지만
일방적 통보일 뿐 그 아이의 승낙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작은방일지라도 혼자 독차지하고
마음편히 두 다리를 펴고 잠을 잤을 아이가
생각지도 않게 호젓한 자리를 빼앗겨야 하는 황당함도 있었을텐데
부끄러운 듯 말없이 그냥 웃고만 있다.

아직은 앳된 모습에서
싫으면 싫다고 자기마음속에 있는 의사표시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할 수있을 정도의 성숙함은 없는 듯 싶은 아이가

가엾게 여겨진다.

아이가 이불을 펴고 누운지 한참이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꾸 좌우로 몇 번씩이나 뒤척이는 것을 보면
내가 낯설고 불편해서 쉽게 잠을 못 이루는 것임에 틀림없다.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소복이 함박눈이 내리던 들녘에 어둠이 밀려오고,
밤이 깊어갈수록 대나무밭을 휘돌아온 스산한 바람소리,
문풍지 틈새로 스며든 바람에
책상위에서 제 몸을 가누지 못해 흐느적거리는 호롱불,
도시의 눈부신 백열등보다
머슴들이 쓰던 사랑방 어두운 호롱불에 있으니
마음에 쌓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큰 강물처럼 흐른다.

어린아이마져 잠이 든 방에 긴 침묵이 흐르고
심난함이 마음을 짓누르며 내뿜는 긴 한숨이 심난스럽기 그지없다.
깊은 꿈속에라도 빠져들고 싶어서
불을 끄고 누웠으나 잠은 쉬 오지를 않는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벽 하나를 두고 외양간에 암소가 킁! 하고 긴 숨을 내 뱉다가
삼킨 여물을 되새김질하여 씹는 소리가그나마 정겹다.

감나무 가지사이로 광풍이 휘몰아치는 듯,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까지 다 덮어보지만
문풍지 떨며 우는소리에 정신은 더 또렷해진다.

휴!........
날은 언제 밝아오나?
긴 겨울밤, 눈보라 몰아치는 어둠에 휩싸인 들녘
그 한가운데 외롭게 서있는 마음 심난한 허수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