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들녘에서(8, 갈등의 계절)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8. 5. 26. 16:33

학교 때 노력동원에 나가는 날이면
눈치껏 딴청을 부리며 보리를 베어 본 일 말고는
들녘에서의 일들은 모두가 처음 해보는 일들이다.

일에 익숙치 않은 탓에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지 않은 것이 없는데도
노동의 시간과 그 강도는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간다.
검게 탄 얼굴, 톡 튀어나온 광대뼈, 움푹 팬 눈자위.....
거울 속에 비춰진 헬쓱해 진 내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5월과 6월 사이,
유채가 꽃이 지고 보리와 함께 익어 갈 무렵부터
농촌에선 가장 힘들고 바쁜 시기로써
보리를 베고 묶어서 탈곡을 하기 위해 한 곳에 노적을 쌓아야 하고
유채는 베어 놓고 껍질이 마르는 상태를 봐 가며 도리깨로 알맹이를 털어야 하며
보리나 유채를 베어낸 빈 밭엔 다시 고구마를 심고
못자리의 모가 적당히 자라면 늦지 않게 모내기도 해야만 할 일이다.

더구나 하필이면 이럴 때 장마가 시작되는지라
유채의 알맹이를 터는 일은 어떻게든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마무리를 해야 하고 보리는 묶어서 노적이라도 쌓아 놓고서
장마 중이라도 비가 그친 날 서둘러 탈곡을 마쳐야지
그렇지 못할 땐 다 지은 농사를 밭에서 썩힐 수밖에 없다.

흔히들 "부지깽이도 한 몫을 한다"거나
"눈 코 뜰 새 없다"고 하는 이 때 만큼은
마실 물을 떠오는 일과 필요한 연장을 챙기는 일과
소를 먹이는 일 등 크고 작은 심부름은 그의 몫이었다.

하루종일 뛰어 놀고 싶을 때인 어린아이가
가끔씩 보리를 베겠다며 낫을 들고 나서는 시늉을 하는데
이를 바라보시던 어머니께서 측은하였던지 혀를 끌끌 차신다.

이른 새벽 동이 틀려면 아직 어두운 시간부터 유채를 베어야 한다.
이슬이 마르면 껍질이 톡톡 터져 땅에 쏟아지기 때문에
유채는 가능한 이른 시간에 베어야 하고,
보리 베기는 이슬이 다 마른 뒤에 하는 것이
바쁜 중에도 일의 순서다.

그러다가도 잿빛 하늘에 마파람이 불거나,
저녁 해가 서산에서 먹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면
어른들의 오랜 경험으로 볼 때 비가 올 징조라 여겨
다른 일을 제쳐놓고 유채를 도리깨질하여 털거나
베어놓은 보리를 묶어서 가래질이라도 쳐 놓아야 한다.

보리베기가 한창일 무렵
보리밭 한 가운데에 둥지를 만들어 알을 낳아 품고 있던 꿩이
요란스럽게 울부짖으며 푸드득 날아간다.
보리를 베어낸 빈 밭에 꿩이 알을 품으러 오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지만
용재가 그걸 봤으니 그냥 놔 둘리는 만무하다.

용재가 꿩알을 하나하나 햇볕에 비춰보면서
열 대 여섯 개나 되는 알을 그릇에 모두 담는다.
"그렇게 보면 뭐가 보이냐?"
'햇빛에 비춰봐서 거무스름하면 새끼가 벌써 생긴 것이고
맑으면 새끼가 안 생겨서 삶아 먹어도 괜찮아요'
녀석의 말이 맞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쪽엔 나보다도 훨씬 잘 아는 녀석이라서 하는대로 그냥 둘 수밖에 없다.

꿩에겐 불행한 일이었지만
저녁 밥상에 올라온 꿩알 찜이
조금은 신기하게 여겨질 뿐 맛은 달걀과 별로 다른 게 없다.

눈코뜰새없이 일을 하던 중에 시커멓게 몰려든 구름에서
기어이 소나기가 쏟아져 베어놓은 보리와 유채를 흠뻑 적셨다.
비도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내리고
결국엔 베어놓은 보리와 유채가 밭에서 그대로 썩기 시작한다.
무심한 하늘에 장탄식이 저절로 나오고 허탈하기 그지없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바람이 없는 잔잔한 날엔
해가 뜨기 한참 이른 시간부터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각다귀 떼가 무차별로 물어뜯어서 피가 나고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다.

밤엔 모기에 시달리고
밝은 대낮엔 각다귀에 시달리는 게 견디기 힘들어
이럴 때마다 생솔 가지를 꺾어 연기도 피워보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각다귀를 쫓느라 두들겨 맞은 팔과 다리가 온통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우리 동네는 지형이 완만한 구릉지라서
벼 한 가지만 심는 논 보다는 여러가지 작물을 심을 수 있는 밭이 더 많은지라
농번기엔 유난히 더 바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지 다른 농사에 비해 심고 캐는 일 말고는
대체적으로 일이 수월하기에
사람들은 대부분의 밭에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 줄기 끄트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
쟁기질로 도톰하게 만들어 진 이랑의 흙을 헤집으며
하루종일 고구마를 심었던 다음날 아침이면
수저를 쥘 수 없을 만큼 손목이 시큰거리고 아프다

동이 환하게 틀 무렵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조차 힘이 드는 날이면
하루쯤 편히 쉬고싶은 생각에
차라리 하루종일 비라도 쏟아지길 바라는 마음도 생긴다.

비가 오는 날 말고는
이른 새벽부터 어두워 질 때까지
밥 먹는 시간 빼 놓고는 한 시도 쉴 틈이 없다보니
그런 바램을 하게 되는 건 하나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물집이 생겼던 손바닥은
터져서 쓰리다가 아물기를 여러 번 반복한 뒤에서야
비로소 단단히 못이 박히고
눈과 이만 빼 놓고는 햇볕에 시커멓게 그을리고 헬쓱해진
거울 속 내 모습이 안쓰럽다.

마음에서 생긴 갈등을 스스로 다독거리기도 하고
체념하 듯 마음 속에 생겨난 갈등을 수시로 비워 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또 밤을 맞이하지만
눕기만 하면 피곤함에 금방이라도 잠에 골아 떨어질 것만 같은데도
정신이 더욱 초롱해질 때가 있다.

한가할 때 생기는 잡념이야 마음에 여유로움으로 정리할 수 있었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지금은 그것마저 쉽지가 않다.

평생을 이런 일을 되풀이 하며 살아오신 내 부모님도 계시건만
일년의 반도 채 넘기지 못하고 여기서 그냥 주저 앉아 버리고 싶은
내 의지력의 보잘 것 없음에 적잖이 실망스럽다.

그러다가 문득,
아랫목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열 한 살 짜리 피난민의 아들을 보며
지금껏 그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호사스러운 내 삶과
머릿속에 박혀있는 사치스러운 의식이 어린아이의 거울에 비춰지는 순간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내가 걷던 길에서 잠시 비켜 선 채로
지나온 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오르는 일이라 생각하고,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자연의 섭리와 나의 의지가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기까지는
고집스레 버티다가 결국엔 몸살로 며칠을 몸져 눕거나
마음에서 갈등하는 날들을 여러 날 보내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아니!
마음에서 갈등이 쌓여 심난하고
육체적 노동이 힘에 겨울 땐
부딪쳐서 넘어지는 것 보다는 비켜가는 것 또한 비겁함이 아닌 삶의 지혜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고 해야 할런지 모르겠다.

포도송이처럼 엉키어있던 개구리 알들이
논바닥에서 올챙이로 다 부화를 해서 헤엄을 쳐 다닐 때를 맞춰
이른 아침부터 백로 때가 날아와 엉금엉금 기어다닌다.
먼 산으로 부터 차츰 더 또렷해지는 뻐꾸기 울음소리에
성큼 다가 온 여름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