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곳에서 아버지께서는 항상 그런 말씀을 내게 하셨다.
"일은 안 해먹더라도 일하는 방법은 꼭 배워야 한다"고.........
(모내기하는 날 )
밖은 아직도 어두운데
어머니께서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4시다.
어제 해가 지고 난 한참 뒤까지
아버지께서 써레질 해 놓은 논을 고르는 일을 한 탓에
허리도 아프고 발목엔 마치 큼지막한 모랫자루 달아놓은 듯 무겁다.
잘 못하여 오늘 하루에 모내기를 모두 끝맺지 못할 경우
우리 식구들끼리 남은 모를 심어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기에
어머니께서 챙겨 주시는 뜨거운 밥을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찬물에 후루룩 말아먹고
어젯밤에 손질해 놓은 볏짚과 못줄을 가지고 논으로 나갔다.
모를 심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는 끝났으나
아버지로 부터 "모를 심는 일꾼들이 일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뒷일을 맡으라" 는
책임을 부여 받았기에 긴장이 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별빛이 초롱하다.
감방산 자락엔 한 가닥 하얀 솜을 옅게 드리운 듯
옅은 안개가 낮게 내려 앉은 들녘에선
물꼬를 넘어 흘러 내리는 물소리만 졸졸 들려 올 뿐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들녘에 홀로 있으려니 오금이 저려 온다.
모를 뽑기 위해선 못자리에 물이 적당히 있어야 한다기에
못자리를 살펴 물꼬를 트고있을 무렵
옅은 안개를 뚫고 인기척이 들리더니
모를 심으로 오는 일꾼들 몇 사람이
저마다 비료포대에 유채껍질을 채워 만든 깔개를 가지고
못자리로 모여든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사람,
논둑에 서서 담배를 한 대 입에 문 채 하얀 연기를 길게 내 뿜어대는 사람,
해장술로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는 사람 등
일을 시작하기 전의 모습들이 제각각이다.
모를 뽑는 동안
숙이네 암소가 간밤에 송아지를 낳은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술취한 철수 아버지 부부싸움하며 장독 깬 이야기까지,
어제 하루에 일어났던 사건 사고의 모든 일들이
일꾼들에게 화젯거리가 되어 오르내린다.
일꾼들이 모를 뽑아 모 타래를 만들어 놓는 대로
논둑으로 채곡채곡 건져내어 물이 어느 정도 빠진 뒤에
모를 심어야 할 논에 넣는 일은 '모쟁이'인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모 타래를 논둑에 건져내고 있을 무렵
아침밥을 이고 오시는 어머니의 뒤에
막걸리를 담은 주전자가 무거운 듯
어깨를 한쪽으로 잔뜩 기울이고 뒤따르는 용재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논둑에서 넘어질 것 만 같아서 불안스럽기만 하나
녀석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쪽 저쪽 손을 바꿔가며
여유까지 부리며 따라온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꾼들이 아침밥을 먹는 사이에
물에서 건져낸 모 타래를 나르기 위해서
지게에 지고 일어서려다가 그만 벌렁 뒤로 넘어졌다.
일꾼들이 밥을 먹다가 말고 이 광경을 보며 웃고 있는데
용재가 달려와서 지게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준다.
두엄을 지다가 넘어져 녀석 앞에서 웃음거리가 된 이후 두 번째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언제 적셔도 적실 수밖에 없는 몸이란 걸 알았기에
차라리 잘 되었나 싶기도 하다.
일꾼들이 "모쟁이(모 심부름하는 총각)한테는 절대로 딸 안 준다"며 웃어대지만
나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모 타래를 함께 건져내던 용재가
"형! 다리에 거머리가 붙었어요!"라고 일러준다.
언제 달라붙었는지 거머리 몇 마리가
발목 복사뼈 뒤에서 내 피로 포식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다.
피를 얼마나 빨아 먹었는지 제 몸에 겨워 스스로 떨어지는 놈들도 있고
이제 막 붙었는지 손으로 떼어도 잘 안 떨어지는 놈들도 있다.
거머리를 떼어 냈지만 그곳에서 흥건히 피가 흘러 내리고
그놈들은 하루종일 그곳만을 계속해서 공격을 해 온다.
이런 거머리 같은 놈들이.........
점심 무렵쯤에 이르러 모 타래 옮기는 일이 겨우 끝나는 시간
휴! 하고 한숨을 쉬려는데 갑자기 뱃속이 허전하다.
그러고 보니 새벽에 찬물로 밥을 말아서 먹고 나서
여태껏 정신없이 서두르다 보니 배 고픈 줄도 몰랐나 보다.
마침 일꾼들이 세참을 먹던 논둑에
안주 그릇과 막걸리 주전자가 있어
대폿잔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키니
막걸리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기왕 입에 댓으니 한 잔을 더 따라서 마시고 있는데
논에서 모를 심던 사람들이 "모쟁이!"를 소리쳐 부른다.
모 심는 일이란 수시로 이동하는 못줄에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춰 심는 일이라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다 심을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일이다.
손에 쥐고 있는 모가 떨어질 땐
직접 가까운 곳에 있는 모 타래를 가져다 심을 수가 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잠시 숨을 돌리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을 그 순간에
주변에 모 타래가 없어서 짜증이 났던지
모쟁이를 불러대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배가 한참 고플 때 두 잔이나 마셔 댄 막걸리 탓인지
뱃속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
논둑에 서서 일꾼들이 모를 심는 곳을 향해 막무가내로 모 타래를 던져 넣으니
물벼락을 맞은 일꾼들이 모두들 아우성이다.
"그래서 내가 모쟁이한테는 딸을 안 준다고 했어!"
배가 고파서 먹는 밥이야말로 꿀맛이라 할 수 있겠지만
모내기하는 날에 먹는 밥은 그것에 비할 수가 없다.
일꾼들 틈바구니에 앉아서
하얀 쌀밥을 한 숟가락씩 양 볼이 터지도록 퍼 넣는 용재의 모습을 보는 순간
행여 부끄러워 먹던 밥도 못 먹고 또, 눈치라도 살필까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새벽부터 서두른 만큼
모내기가 일찍 끝날 것 같았으나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하루해를 기어이 채우려나 싶다.
오후 새참을 마치고 난 뒤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상사소리가
모내기를 다 끝낸 뒤 까지도 끊일 줄 모른다.
구성지게 불러대는 앞소리를 따라서
뒷소리를 흥겹게 부르는 사람들마다
어깨춤을 덩실덩실 거리는 흥겨운 모습은
모내기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막걸리를 술독에 가득 걸러 내 놓고
한잔씩 하시라며 이웃 사람들을 집으로 부르니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이 비좁다.
새벽부터 가뜩이나 졸였던 긴장이 풀려서 그러는지
어머니께서 정성으로 빚으신 술이
오늘따라 더 취하는 듯 싶다.
예쁜 딸이 있다는 일꾼들 몇 분 한테서
막걸리 몇 사발을 거침없이 받아 마시고
술에 흥건히 취한 꿈을 꿨다.
'글 - 허공에 쓴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부는 들녘에서(11, 장날) (0) | 2008.05.26 |
---|---|
바람부는 들녘에서(10, 술 익는 계절) (0) | 2008.05.26 |
바람부는 들녘에서(8, 갈등의 계절) (0) | 2008.05.26 |
바람부는 들녘에서(7, 개구리 우는 밤) (0) | 2008.05.26 |
바람부는 들녘에서(6, 보릿고개) (0) | 2008.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