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아저씨가 소달구지를 끌고 장에 가신다기에
땡볕에 잘 말려놓은 유채 한 가마를 곡간에서 꺼내
풍로에 먼지와 티끌을 깨끗이 날려서 대저울에 무게를 달고 있을 때
용재가 비시시 눈을 비비며 나온다.
어젯밤 잠자리에서 "내일 장에 갔다 올테니 소 풀이랑 잘 뜯겨라"고 하는 말에
'혼자 가세요?'를 서너 번 씩이나 물어 올 때서야
녀석이 왜 자꾸 묻는지 그 속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깨우지 않으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는 녀석이
일찍 일어난 심사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 할 만하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장에 가시던 날
보따리를 들고 따라갔다가 온 뒤
생전 처음으로 구경했던 장터의 풍경을
두고두고 되새김질 해 온 녀석이었다.
"농약만 사 가지고 얼른 올란다"며 기대하지 말라는 듯 잘라 버렸으나
따라 가고 싶은 생각을 아침까지도 버린 것 같지는 않다.
밥 그릇에 담아주는 밥을 안 비우는 일이 거의 없었던 아이가
밥을 다 먹지도 않고 나가는 걸 보시던 어머니께서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걱정하시기에
어젯밤에 있었던 일 부터 자초지종 말씀을 드렸더니
바쁜 일도 없으니 구경도 시켜 줄 겸 데리고 다녀오라 하신다.
볼 부은 개구리 마냥 부은 채 내 주변만 맴돌던 녀석이
어머니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수하고 새옷으로 갈아 입으며 호들갑을 떤다.
기왕에 같이 가야 한다면 대장간에 들러서
낫과 괭이의 무뎌진 날을 세워 오려고 새끼줄로 묶어놓은 뭉치를 메고선
먼저 대문 밖을 나서는 꼴이 저렇게도 좋을까 싶다.
"주인이 장에 가면 머슴은 두엄을 지고 따라 나선다"는 속담이
오늘 아침 이 녀석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달걀 꾸러미나 닭, 크고 작은 보따리에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싸서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장으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 틈새에 섞여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용재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소달구지에 실어보낸 유채를
누구에게 어떻게 팔아야 할 것인지 가뜩이나 걱정스러우나
녀석은 그런 것 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장으로 향하는 일행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치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마냥 싱글벙글 이다.
장터 입구에 있는 대장간에 들러 가져 온 연장을 맡기고 나서
실어보낸 유채를 팔아 넘기기 위해서
소달구지가 먼저 와 있을 장터로 서둘러 가야 하는데도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매고 웃통을 벗어 재낀 장정이
풀무질로 빨갛게 닳은 쇠를 두둘겨 대는 광경에
용재가 신기한 듯 넋이 빠져있다.
두번째 와 보는 장터임에도
마치 생전 처음 보는 광경들을 샅샅이 훑거나 두리번거리면서도
장터를 가득 매운 인파에 행여 나를 잃어버릴까봐
내 허리춤을 잡고 졸졸 따르는 녀석의 꼴이란 다름 아닌 촌놈이다.
그러면서도 엿장수 옆을 지나칠 때 마다
녀석에게 잡힌 허리띠의 장력이 팽팽해지곤 한다.
그냥 모른 채 그냥 지나치려니 안쓰럽다는 생각에
엿가락 몇 개를 사서 들려줬더니
내겐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꿀먹은 벙어리인냥 하며 뒤를 따르는 녀석에게
서운한 마음조차 없는 건 아니다.
소달구지가 기다리는 곳에 다다르니
유채를 사려는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와 기다리고 있다가
주인인 내가 나타나자 서로 사겠노라고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인다.
"한푼이라도 더 주는 사람한테 팔겠다"는 한 마디에 실랑이도 그치고
그 중에서 비싸게 사겠다는 사람에게 팔아 넘기고 나니
장으로 오는 동안 걱정했던 게 쉽게 해결되어 마음이 한결 가볍다.
농번기가 끝난 뒤 한가한 때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모두 장에 나온 듯 발 디딜 틈도 없다.
대목을 만난 양 온갖 물건들을 난장에 펴놓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장사꾼들과
장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로 뒤엉킨 장터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다.
생선이라도 몇 마리 사려고 어물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이르니
징과 꽹과리를 치며 지나가는 풍물패의 뒤를 따라
장에 나온 수많은 인파들이 구름처럼 몰려간다.
허리춤을 잡고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용재가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는 듯
이젠 앞장에 서서 나를 끌고 사람들의 뒤를 따른다.
우시장 옆 울타리도 없는 넓지막한 천막엔
풍물패를 따라 온 많은 인파를 모아놓고 시작된 공연은
원숭이의 세발자전거 묘기에서 부터 마술사의 불쑈까지
용재는 물론 장터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썩 괜찮은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일이든 목적이 있게 마련이라서
사람들의 관심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회충약 선전으로 시작된 약장사가 만병통치약으로 옮아갈 때를 맞춰
온통 정신이 빼앗겨 있는 용재를 억지로 끌고 밖으로 나왔지만
아쉬움이 많은 듯 자꾸만 뒤를 돌아 보곤 한다.
어물전에 들러 고등어 몇 마리를 사 가지고 나오는 길에
제 키보다 훨씬 큰 상어를 보고 용재가 입을 다물 줄 모르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렇게 큰 고기는 처음 보는가 싶다.
어물전을 빠져 나오려는데 용재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니
들러야 할 중요한 곳 한군데가 빠졌다.
그렇잖아도 약장사 하는 곳에서 머뭇거린 까닭에
집에 돌아 와 점심을 먹으려던 계획은 이미 어긋난 셈이라서
용재 녀석을 떠 볼 속셈으로 "용재야! 집에 가서 밥 먹을래? 여기서 먹고 갈래?"하고 물었더니
뭘 그런걸 다 물어보냐는 듯 히죽히죽 웃는다.
사람들로 복잡한 국숫집에 들어가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국수 두 그릇을 시켰으나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다 먹어치우고 나서
내 국수그릇을 힐끔거리는 녀석에게 그냥 말 수는 없다.
반찬 한번 집어먹지 않고 국수 한 그릇을 한 입에 때려 넣는 녀석에게
하는 수 없이 내 그릇에 남아있는 국수를 몇 가닥 덜어 주려는데
국수 가닥이 용재 그릇으로 모두 휩쓸려 가버리고
남은 것은 고기 기름만 둥둥 떠 있는 국물뿐이다.
국수로 배를 채운 탓인지
땡볕이 내리쬐는 한 낮의 뜨거운 황톳길에서
어깨에 멘 연장과 농약 보따리가 가볍지만은 않을텐데도
사탕을 입에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껑충거리는 걸 보면
녀석을 가끔씩 장에 데리고 오는 것도 괜찮을 일일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를 따라 처음 장에 갔다 온 뒤엔
침이 마르도록 내게 자랑을 늘어놓곤 했으나
이젠 누구한테 그 자랑을 늘어 놓을지가 궁금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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