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익는 계절.
기계 다루는데 있어서는 관심도 소질도 전혀 없으셨던 아버지께서
먼 친척 되는 아저씨의 솔깃한 제안으로 발동기와 탈곡기를 사셨지만
아저씨가 손을 다친 후론 탈곡은 엄두도 못 내고
도정기를 사서 방아를 찧는데 사용할 뿐이다.
방아를 찧을 때도
손이 불편한 아저씨를 모셔다 기계를 돌려 놓으면
기계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갖지 않은 채
도정기에 나락을 부어넣는 일만 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불만이
적잖음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방아를 찧게 되면 곡식은 물론
소와 돼지와 닭에게 먹일 사료를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음에도
남의 손을 빌려야만 기계를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이 답답하기만 한 어머니께서
어느 날 부터 나에게 기계 다루는 걸 배워보라는 눈치시다.
노적으로 쌓아둔 보리가 비에 젖어 싹이 나기 시작하고,
장마는 또 언제 끝날지도 모를 일 이여서
예전에 재미 삼아서 발동기 시동을 걸어 봤던 그 경험 하나만 믿고
탈곡기를 꺼내 마당에 차렸다.
고장이 너무 잦은 까닭에 "애통기"라고 부르던 발동기로
이틀동안이나 꼬박 보리탈곡을 하는데도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이 일만 끝나면 힘겨웠던 농번기를 견뎌 냈다는 뿌듯함 때문이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두분의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 방아 만큼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뎌디게 하는 탈곡일지라도 일하는 재미가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들녘이 초록으로 한층 짙어 갈 무렵 우리 마을의 여름이면
아낙들은 밭에 나가 아침 일찍부터 어둠이 내리는 저녁까지
땡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흘리며 김을 매는데도
남정네들은 나무그늘 아래서 낮잠을 즐기는 여유로움도 있으니
겉으로 보기엔 남자와 여자의 불공평함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계절이었다.
이른 아침에 어머니께서 고구마밭에 김을 매러 가시는 길에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어머니를 따라 나섰으나
한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돌아 오고야 말았다.
남자들에게 있어 쪼그리거나 앉아서 하는 일이
여자들에 비해 신체 구조상 더 어렵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지만,
일도 종류에 따라선 남자와 여자의 일을 구분해서 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 동네에서 밭에 앉아 김을 매는 남정네를 볼 수 없는 이유를
직접 체험하여 깨닫는 순간이었다.
반면에 논에 김을 매는 일은 모두 남자들의 몫이다.
나고 자라는 풀들이 가짓수도 많고 돋아나는 시기도 각각 달라서
남정네들은 서로 품앗이를 하며
일정한 기간을 두고 초벌, 두벌, 세벌까지 김매기를 한다.
10여명이 함께 공동작업을 하는 두레에 용기를 내어서 끼어 들었지만
키가 남들보다 커서 다리가 긴 내 신체적인 조건은
엎드려 하는 일이 도무지 맞지가 않다.
아니! 일에 능숙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잘 못 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하루는 정신력으로 버티며 김매기를 하고
두 번째 날은 오전 한나절을 기를 쓰며 버텨내다가
체력의 한계로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논둑에 철썩 힘없이 주저 앉아있는 내가 힘겨워 보였는지
"기왕 시작을 함께 했으니 끝도 함께 마무리하자"며
김매는 일은 자기들이 다 할 테니
나는 뒤에 따라 다니며 밟혀서 쓰러진 모를 세우는 일과
잔심부름을 하라고 한다.
내 등에 진 무거운 짐을 덜어서 그들이 함께 나눠지겠다는 데
마음에서 느껴지는 정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논에 김매기를 할 때면 술도 때에 맞춰서 더 많이 담가야 했던 것은
일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술을 마시는 남정네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내기나 김매기 등 큰 일을 할 때 술 만큼은
없어선 안될 필수품이었다.
술을 담그는 날 어머니께서는 한 나절을 그 일에 매달리셨다.
보리쌀, 좁쌀, 쌀 등을 시루에 쪄 내어 그늘진 곳에 멍석을 펴서 식힌 다음
누룩과 잘 버무려 술동이에 넣고
술약(이스트)을 풀어 잘 섞여 시원한 곳에 놓아두면
한 사흘쯤 후에는 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술 익는 냄새가 나는데
나는 술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런 술 익는 냄새는 언제 맡아도 참 좋다.
먹는 일이라면 특별한 소질이 있는 용재가
술밥을 찌는 날엔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쌀이 많이 섞인 술밥을 골라 한 입 넣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시던 어머니께선
"너는 술을 못 먹으니깐 술밥이라도 많이 먹어라!"며 웃으신다.
별 탈이 없이 두레에 함께 어울려 김매기를 하는데
건너 마을에 집집마다 술 조사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조용하던 동네가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지게에 술독을 지고 가까운 산 속에 숨기는 사람,
무성한 고구마밭에 술독을 놓고 고구마 줄기를 끌어 모아 덮는 사람,
논둑 낮은 곳에 술독을 숨겨놓는 사람 등 온 동네가 비상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누룩을 이고 술독을 지고 허겁지겁 산으로 가시는 모습에
긴장감이 깊게 베어있다.
입에 맞지도 않고 머리만 아프다는 주조장의 술 또한
가정에서 만드는 술과 같은 재료를 사용할텐데도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라서
술을 담가 먹는다는 것은 식량 낭비라는 명분을 앞세워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술만 단속을 한다는 건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
또한 나라에서 인정해 주는 주조장의 술을 두고
걸리면 벌금까지 물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술을 담가 먹는 이유에 대해서도 납득이 가질 않는 건
내가 아직 술 맛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논에 김을 매는 이 때 쯤이면
동네 어느 집을 가더라도
새콤한 김치가닥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쯤은 걸쭉하게 얻어 마실 수 있을 때다.
집 모퉁이 술항아리에서 술 익어가는 소리와 함께
논배미 마다 성큼 자라난 벼가
들녘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을 따라
초록 물결을 만들며 춤을 추는 광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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