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대에 있어 등잔불 또는 호롱불은 전기가 없던 시절에 어두움을 밝히는 참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였지만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곧장 꺼지고 말아 가냘파서 위태로운 상황을 빗대어 풍전등화(風前燈火)라고들 합니다.
그 호롱불만큼 몹시 나약하게 태어난 핏덩이가 생의 언덕배기를 가까스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은 내 어머니의 희생과 집념 그리고 내게 따른 운이 아니었으면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던 날 핏기없는 아이를 살리겠다며 의원을 잦아갔다가 만나지 못해 돌아오는 길의 한 모퉁이에서 눈보라가 그치길 기다리며 있을 때 기다란 수염을 한 노인네가 다가와 보자기에 싼 아이를 들여다 보고선 "이 아이를 안 봤으면 몰라도 본 이상 그냥 갈 수는 없다"며 집까지 따라와서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침 치료를 하고선 겨우 아침밥 한 그릇 얻어 드시고 떠나셨다는 동화나 전설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속의 그 노인은 내 가슴 속에서 평생동안 은인으로 자리잡고 계십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아 내가 나이를 의식할 때쯤엔 당시 내 아버지 나이였을 마흔다섯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했던 아픈 기억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노라니 까마득히 잊힌 채 마흔의 시절을 훌쩍 넘기고 오십, 육십, 그리고 지금은 어느 노인네들 못잖게 남은 생을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소한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세상살이에 대한 집착 보다는 나를 살게 해 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약속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2년에 한 번씩 해 주는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챙기며 별 탈 없이 지내오다 십수 년 전부터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겨났습니다.
당뇨를 판단하는 데 있어 공복혈당이 100 이하면 정상, 100~125면 당뇨 전 단계, 126 이상이면 당뇨병으로 판정한다는데 검진을 받을 때마다 공복혈당 수치가 97, 99 등등 정상치 경계선에서 간당간당하는 것입니다.
당뇨병이란 혈중 포도당 농도의 높낮이에 따라 소변을 통해서 배출되는 양도 다르며 포도당의 농도가 몸에 오랫동안 높게 유지되는 경우 여러 가지 합병증을 일으켜서 끝내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라고 합니다. 이는 유전이 아니라면 일상에서 잘못된 습관을 바꾸는 것으로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데도 주변에 당뇨병으로 얼마만큼 불편한 삶을 사는지를 자주 봐왔던 터라 경계와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걱정스러움에 등산도 더 열심히 다니고 솟구치는 식탐도 짓누르며 뱃살을 빼고 체중을 10kg 이상 줄이다 보니 얼굴엔 예전에 없던 주름도 생겨나 10년은 훌쩍 나이 들어 보입니다. 먹성 좋은 사람에 있어 먹는 재미를 빼버리면 사는 재미의 반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이라고 할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병을 피할 수만 있다면 겉늙어 보이는 것쯤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 검진에서 공복혈당이 갑자기 107로 널뛰기하여 "공복혈당장애 의심(당뇨전단계)"이라는 암울한 보고서가 나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의사를 면담 과정에서 혈당의 수치를 더는 높아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니 내가 그동안 해왔던 일상적인 것들 말고는 새로운 게 없어 난감하기까지 합니다.
오래전 누군가가 “앞으론 Know-How가 아닌 Know-Where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뜻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으나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수시로 찾아서 활용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눈에 들어오는 단어 하나와 그와 관련된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Berberine” “매자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약” “체내혈당을 낮추는 효과가 검증되었으나 국내에선 생산은 물론 수입도 하지 않아 해외직구로만 가능하다”라는 설명입니다.
마침 미국에 사는 친구가 있어 연락했는데 그로부터 한 달쯤 후에 친구한테서 6개월분의 약이 보내왔고, 그 약을 아침저녁 식사 직후 2번씩 3개월 복용하고 약 7~8개월쯤 쉬었다가 나머지 3개월분을 마저 복용하였습니다. 4개월 이상 연속해서 복용은 권장하지 않는다는 의사들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머리에서 내 어렸을 적 사경을 헤매던 때를 풍전등화(風前燈火)라 비유했던 것은 선천적으로 폐와 기관지가 매우 좋지 않아서였습니다. 삶 자체가 숨을 쉬는 일인데도 어릴 적 앓았던 그 생채기로 인해 일상에서 숨 쉬는 것에 부담스러울 때가 더러 많이 있습니다. 그 불편을 덜어내고자 오래전부터 설탕에 우려낸 도라지 돌배 오미자 등의 즙을 하루에 한 잔쯤 마시며 삽니다.
흰쌀밥과 흰 밀가루로 만든 음식과 더불어 설탕이 당뇨에 가장 좋지 않다고 합니다.
적잖게 정성 들여 만든 즙을 버리자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담가놓은 게 떨어질 때까지만 먹고 그다음부턴 이 재료들을 차로 끓여서 먹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러고 보면 107이라는 숫자가 못 버틸 만큼의 아주 큰 충격은 아니었나 봅니다.
올해는 홀수년 출생자들의 건강검진이 있는 해입니다.
어느 때보다 걱정이 앞서는 상황에서 지난 5월 15일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걱정 중의 한 가지인 폐와 기관지의 상태도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서 비용을 더 들여 폐 CT도 촬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며칠 전 통보를 받았습니다.
결과보고서의 "81"이라는 수치에 눈을 의심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식성이 탁월한 까닭에 고기나 채소 등은 가리지 않고 먹어대며 체중을 관리하느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십수 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가 나온 것은 이 약의 효과 외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약이든 모든 사람에게 같은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 사례자가 권하는 내용으로 봐선 이 약이 당뇨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약으로 몸을 다스리는 일은 어쩔 수 없을 때만 해야할 일입니다.
또한 이번 검사의 결과치가 앞으로도 아무런 노력 없이도 지속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수년 전 체중 관리를 한다고 10kg 이상을 빼고서 고향에 계시는 누님한테 갔을 때 “너 죽으려고 환장을 했냐”며 호된 꾸지람을 듣던 일이 생각납니다.
내 경험에 비춰볼 때 60대 이상에서는 몸을 빼는 무게만큼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 더 겉늙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거울앞에 설 때마다 거울속에 있는 낮선 노인네를 멀거니 바라봤던 일도 생각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걸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70에서야 얻은 깨달음입니다.
2025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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