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술 생각 나는 날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12. 7. 07:01

눈도 그렇다고 비도 아닌 어중간한 진눈개비는
해가 떠서 기온이 올라가면 비로 바뀌는 게 통상적인 일입니다.
눈도 진눈개비도 아닌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어쩌면 눈으로 바뀌어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건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내 안에서의 바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기다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늘이 절기상으로 대설이고
기왕 내릴 바엔
겨울엔 비 보다는 눈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입니다.

초저녁에 간간히 내리던 가랑비가
새벽녘까지도 계속되었는지
도로를 적신 빗물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되어
다른 때보다 눈부심이 더 합니다.

어젯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포장마차 옆을 지나는 순간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망각한 채

술 한잔 하고싶다는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거나
기분이 좋은 날이거나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날이거나
아니면 기분이나 날씨와는 전혀 상관없는 날에도
가끔씩 술을 마시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술을 자주 마셨던 건 아니었지만
마실 때 만큼은 내 스스로가 취함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이 정도면 됐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마시곤 했으니
양으로 따지면 한 두잔이 아니라 한 병 남짓일 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평소에 워낙 재미없는 사람이지만
술에 취할 땐우스개 소리도 더러 하는 터라
아내는 내가 술 기운이 있을 때를 더 좋아했습니다.

만약 하루가 멀다하고 술을 마셔대거나
술에 취해서 흉한 꼴이라도 보게 했더라면 그러지는 않을 건데
어쩌다가 한번씩 안 하던 짓을 하는 내가
재미있어 보일 수도 있었으리라는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은근히 술국을 기대하곤 했지만
아내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술국이라며 끓여줬던 기억은 없습니다.
이런 날 아침 식탁에 앉을 때면
따끈하고 개운한 국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벼슬을 한 것도 아니라서 차려주는대로 먹을 뿐
불만이나 불평을 해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내 식성이 좋은 탓이겠지만
수고해서 차려 준 음식을 앞에 두고서 투정을 한다는 건
편하게 얻어먹는 사람으로써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마실 때 즐겁게 마시고
술과 관련해서 숨기고 싶을 만큼의 부끄러운 기억도 없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술 버릇만큼은 괜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술을 입에 대 본지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합니다.
지난 5월 초에 병원 문을 나들락거리기 시작하고서 연말이 가까웠으니
술의 의미를 아는 사람으로써 오늘같은 날에 술 생각이 나는 건

하나도 이상할 일이 아닙니다.

다음 주 화요일은 매달 한번씩 정기검진을 받는 날이라서
잊어버리지 않고 주치의에게 물어볼 생각입니다.

이제 술 마셔도 괜찮겠냐고........

2007,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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