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왔던해의 이른 봄,오금이 저릴만큼 외롭고 쓸쓸해서 견뎌내기쉽지않았던날들도학교에서새 친구들을 사귀고 어울리게 되면서부터 차츰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가슴속에 묻어놓은 채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쩌다 토요일에가끔씩 다녀오곤 했던 고향이었지만가슴속에쌓아놓은 것들을 다 씻어내기엔 하룻밤의 시간은 너무 짧기만 했었는지도 모를 일.그래서 그랬는지방학을 며칠 앞둘 때마다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에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들떠 하루하루가 더디다는 느낌은작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그해겨울엔아궁이에서 물이 솟아 연탄불조차 지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따뜻한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은방학이 가까워 올수록 눈덩이처럼 커질 수밖에 없는일이었다.방학이 시작된날 이른 아침에첫차를 타고 서둘러고향으로 내려갔던 이유이기도 했다.
농촌에서의 겨울이란풍년이든 흉년이든지난 가을에걷어들인 곡식이창고에 넉넉히 있을 때라서농사일로 바쁘고 힘에 겨운 봄 여름 가을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다.나또한 서투른 농사일을 거드느라힘에겨워 할 일은 없어서여름방학 보다는 겨울방학이 마음편하고 더 좋았다.
고향에있을 때만큼은 내가 지어먹던 밥보다 어머니께서 해 주시는 밥이 훨씬 맛있어서, 연탄불이 꺼질까봐 마음졸일 일도 없어서, 새벽닭이 울건 말건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늦잠을 잘 수 있어서,눈이 내린 날 아침이면아버지께서 마당을 쓰는 소리에 깨어나눈가래로 눈만 치우고 나면 그 뿐방 청소도 빨래도 설거지도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겨울방학 전부를 고향에서 천하태평하게 보낼 생각은 처음부터 아니었던 터라 새해가 시작되면 곧 바로자취집에 돌아 올 마음을 먹고 있었다.고향을 떠나 올려는 바로전날, 저녁 밥상을 사이에 두고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주인댁 누나의 이야기를 해 드렸더니만“시집도 못간 처녀가 참 안되었다” 하시며못내 안타까워 하셨다.
다음날 아침반찬 몇 가지를 보자기에 싸 머리에 이고 버스를 타는 곳까지 배웅을 해 주시던 어머니께서주인댁 누나의 이야기를 불쑥 꺼내셨다.
"연탄불 같은 건몸이 성치않은 주인댁 처녀가 신경을 쓰지않도록 해라"
"주인댁의 그누나가 시골 들녘을 구경하고 싶다던데요"
"들녘에 뭐 볼 게 있다고? 더구나 요즘엔 추수가 끝나아무것도 없는데?"
"집에만 박혀 있다보니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서 그런가 봐요"
"시골에선 대문밖에 나가면 들인데그 불편한 몸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겠냐?"
날씨가 따뜻해지면 자전거를 빌려서 주인댁 누나를태우고 시내에서 가까운들녘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생각은 했으나몸이 불편한 사람을 멀리내 고향까지 데려온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어머니께선 주인댁 누나가 마치 우리 고향에 오고 싶어하는것으로잘못 알고계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다시 되돌아 온 자취방의 마루엔 자욱하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대문을 열고 닫는 인기척이 나면 주인 아주머니께선누가 왔는지문을 열어 보련만 집안에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다녀왔다는 인사는 해야할 것 같아서마당에서아주머니를 두 세 번부르고한참만에야 방문이 열리면서주인댁 누나가 힘겨운 모습으로 나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너! 여태껏 뭐하고 이제 오냐? 엄마 젖 많이 먹었냐?"
"안녕하세요? 누님!많이 편찮으신가 봐요?"
"여태껏 감기 때문에 밖에 한 번도 못나가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핏기 없는 얼굴이었는데 그 동안 더 핼쑥해진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네 방이 차가울 텐데 이리 들어와라!”
“아주머니께서는 어디 가셨어요?”
“친척집에 결혼식이 있어서 가셨다가늦게나 돌아오실 거다.”
“좀 누워 계셔요, 방이랑 마루도 좀 청소하고 연탄불도 살려야겠어요.”
“그럴래? 대충해 놓고 따뜻해 질 때까지 이리 와 있어라!”
숯에 불을 붙여 연탄불을 피우고 있는 사이에 누나가 아픈 몸을 끌듯하며 마루로 나왔다.
“그 동안 네가 없는 사이에 날씨가 너무 추웠어! 날마다 눈이 내리고, 바람도 차고......햇볕을 아주 못 볼 줄 알았다.“
“그래도 요즈음 며칠은 따뜻했잖아요?”
“그래, 그런데 이놈의 감기가 나를 이렇게 꼼짝 못하게 만들었지!”
“누님, 바람 쐬면 안 좋을 텐데 방으로 들어가시지 그래요?”
“아니! 이제 괜찮아! 감기도 웬만해지고 햇볕도 따뜻하니 밖이 더 좋다"며 마루에 앉아 햇살의 온기를 느끼려는 듯손바닥으로 마룻바닥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부모님께선 안녕하시지?”
“겨울이라서 가마니 짜는 일 아니고는 한가하셔요.”
“시골에 가본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까마득하다. 요즈음엔 왠지 눈에 덮여있는 시골풍경이 보고 싶더라“
“얼마 전에 내렸던 눈은 다 녹아버리고 없던걸요“
“그래, 그렇겠지...”하며 아쉬워하는 표정의주인댁 누나가 참 안됐다 싶어 "누님,저희 시골 구경 시켜드릴까요?"라고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차, 내가 이런 말을왜 하고 있을까'하며금새 후회를 했지만설마 주인댁 누나가버스를 타고서도 한참이나 걸려야만갈 수 있는 나의고향까지 갈마음은 없을 거라는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주인댁 누나는 마치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마냥환한 표정을 지으며 "너, 그거 정말이지?"라며지금 당장에약속이라도 해놓겠다는 듯내게 되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내심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지만그렇다고 해서 가뜩이나 큰 기대에 부풀어버린주인댁 누나에게 '그냥 해본 말'이라며 번복해서 실망을 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짜만 정하지 않았을 뿐 주인댁 누나를 내 고향에 데리고 가는 약속은이렇게 순식간에 이뤄지고말았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찬바람을 쐬게 해서 병이 깊어지는 것은 아닐지,주인댁 아주머니께서는 승낙이나 하실 것인지,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선 또 어떻게 생각하실런지 하는 이런 저런 걱정들로 잠이 오질 않았다.
차라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긴 겨울이 계속되어 오랫동안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되어버렸으면 좋겠다는부질없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론주인댁 누나의 소원이니 만큼 내가 조금 불편할 일일지라도 기꺼이 감수할 마음도 생겨나아버지께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에 제가 말씀드렸던주인댁 누나가 우리 시골을 꼭 한번 구경하고 싶다고 하길레날씨가 따뜻해지면한번 다녀오자고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저의 방학이 끝나기 전에내려가겠아오니 아버지 어머니께서 불편하시더래도 이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의견을 묻거나 허락을 얻는게 아니라일방적인 통보의 편지를 쓰면서도 이해해 주실까 하고 작은 걱정조차하지 않았던 것은,싫고 좋은 것들을 웬만해선겉으로 표현을 안 하셔서 어렵긴 하지만누구보다 정이 많으신 아버지라서 철없는아들이 저지른 작은 불편쯤은 기꺼이 감수해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저녁 밥상머리에서주인댁 누나의 이야기를해드렸던건차라리잘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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