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였던 눈이 따스한 햇볕에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다시 아궁이에서 물이 솟기 시작했다. 때문에또 다시추운 방에서 새우잠을 자야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마치 잘못을 저지른사람처럼안절부절 못하는 주인댁 누나에게 오히려 내가 미안스러운 일이었다.
반면에햇볕이 따뜻한 날이면마루에 햇살이 걷힐때까지 그곳에서 지내는 시간들이많아지게 되었고 주인댁 누나는내가학교에서 집에 돌아올 때면 읽고 있던 책을 덮어놓은 채이야기를 주로 하고 나는거의 누나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다.
“얘! 하늘이 나에게 연탄가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모양이다”하며 유난히 하얀 이를 내 보이며 웃는 주인댁 누나의 모습이 이날따라 더 곱게 보였다.
“그러게요!”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춥지가 않아서 네가 추운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아도 되고 또, 저기 목련나무에 하얀 꽃이 피면........참! 얘야! 너,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는 게 뭔지 알아?“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나는 시골에서 자라면서꽃이 먼저 피는몇 가지를 알고는 있었지만주인댁 누나가 묻는 심사는 따로 있는 것 같아서대답을 성큼 하지않은채고개만 갸웃거렸다.
“목련, 그 중에서도 하얀 목련은 잎보다꽃이 먼저피고 그 꽃은 항상 북쪽을 향해서 피는데 그 이유를 알아?“
'봄'하면생각나는 진달래와 개나리가나올 줄 알았으나 생각지도 않았던 목련이 나오고 꽃도 북쪽을 향해서 핀다는 건지금 처음듣는 이야기라서“몰라요.그 꽃이 북쪽을 향해서 피어요?”라며되물으니기다렸다는 듯이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라며 시작하였다.
“옛날 남쪽나라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았었데. 그 공주는 북쪽나라의 용감하고 멋진 왕자님과 서로 사랑하며 결혼을 약속하고 있었지만 북쪽나라엔나쁜 악마가 공주를 탐내고 있었데. 왕자는그 악마를 없애지 않는 한 사랑하는 공주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행복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병사들을 거느리고 악마를 무찌르러 갔었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악마와 싸울 때함께 간 병사들이 모두 죽고혼자 살아남았던왕자는악마와 싸울 때 입은상처때문에 돌아오는 머나먼 길에서 그만 죽고 말았데.한편, 싸움터로 간 왕자님이 언젠가는 꼭 돌아오리라 생각하며애타게 기다리던 공주도왕자의 죽음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단다"
주인댁 누나는 대문옆 목련나무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봄이되자 공주가 죽은 자리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돋아나 자라고 그 이듬해 부터이 나무에서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의 마음처럼언제나 추운 나라 북쪽을 향하여 하얀꽃을 피우게 되었단다“며 가지 끝에 방울방울 꽃망울이 맺혀있는 대문 옆의 목련나무를가리켰다.
나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어서 대뜸 주인댁 누나에게 물었다.
"아, 그럼자목련은 바로........."
"그래, 왕자가 죽은 자리에서도 나무 한 그루가 돋아나서 자주색 꽃을 피웠는데 그게 바로 자목련이야. 자목련은 잎이 먼저 나오고 꽃은 나중에 피지만 왕자님의 피로 물들어서 핏빛으로 핀단다”
“그러고 보니 목련꽃엔 참 슬픈 이야기가 있었네요?”
“응, 그래, 슬픈 이야기이지........”
가지 끝마다 뭉퉁하게 꽃 몽우리를 하고서 봄을 기다리는 목련나무를 바라보는 누나의 표정이 마치 싸움터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처럼 지치고 쓸쓸하고 또 한없이 슬퍼 보였다.
그러는 누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도 몰래 생각지도 않은 말을 당돌하게 뱉어내고 말았다.
“누님께선 그런 왕자님이 안 계세요?”
“왕자님?”하면서전혀 어림도 없다는듯 누나가 큰소리로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지만웃음의 뒤끝엔 왠지 허전하고 쓸쓸함이 짙게 베어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은 나에게 사랑을 처음부터 주지를 않았어! 나의 행복도, 마지막 남아있는 건강까지도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갔어! 난 지금 빈 껍데기뿐인걸?“
괜히 물어봤다. 생각지도 않은 말이 왜 튀어나왔는지 내 경솔함에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주인댁 누나는 비록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누님, 미안해요. 제가 괜히......”
“아니다, 미안하긴, 추운데 나 먼저 들어갈란다”하면서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루에서 일어나 절룩거리며 안집으로 들어갔다.아직 마루에서 햇볕이 걷히기엔조금은 더 있어도 되건만 주인댁 누나는 내게어두운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는지 안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생각없이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린 것 같아몹시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업질러진 물이 되어버렸다. 여윈 얼굴에가득했던쓴웃음과절뚝거리며 방으로 돌아가는 누나의 뒷모습이 함께 아른거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뒤로도 주인댁 누나는나를어린아이처럼 여기며옛날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아이가 재미있어 하는지확인을 하거나, 때론 나를 어른처럼 여기며 누나가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여러가지일들을 회상하듯들려주곤 했지만 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리면서도 함부로내 생각을말하거나 궁금한 것이 있더래도 주인댁 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물어보곤 했었다.
내가 그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사람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던 때가아마도 이때부터가 아니었나 하는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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