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렸던 눈 때문인지 햇볕은 맑으나 바람 끝은 차갑기만 했다.
쌓인 눈이 꽁꽁 얼어붙어 녹을 기미가 없는데 마루에 앉아있던 주인댁 누나의 입술이 더욱 파르스름해 보여 누나를 두고 그냥 혼자만 방에 들어 갈 수가 없다.
"지금 오냐? 오늘은 좀 늦었구먼?"
마치나를 기다리고 있었던것처럼 주인댁 누나의 표정이 밝아보였다.
"예, 청소당번이었어요. 누님 춥지 않으세요?"
"응, 옷을 더 껴입었는데도 좀 추운 것 같다."
아랫목이 배를 깔고 엎드리면 좋을 만큼 따뜻해서 자라목을 하고 마루에 앉아계시는주인댁 누나를 불렀다.
"누님! 방으로 들어오세요. 방이 아주 따뜻한데요?"
"그래? 너 공부하는데 방해가 안 될까?"
"공부는 무슨......괜찮아요. 들어오세요!"
누나가 처음으로 내 방에 들어와 아랫목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불을 끌어다 어깨까지 덮는다. 학교에 갈 때 아랫목에 이불을 깔아놓기를 잘 했다.
"방이 따뜻해서 참 좋다! 연탄은 점심때쯤에 갈았다."
"예, 이제 연탄 가는 것은 제가 할게요. 공기구멍을 잘 조절하여 아침에 학교 갈 때 갈고 가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해 봐라, 하지만 가끔 들여다 볼 테니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연탄을 갈다가 행여 무슨 일이라도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연탄은 시간에 맞춰서 갈아놓고 학교에 가고 싶었다.
누나와 함께 마루에 앉아있을 땐몰랐으나 방에 함께 있으니 왠지 서먹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불을 덮어쓰고 앉아있는 누나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싶어서 책상 의자에 앉아 정리할 것도 없는 책상을 정리하는 척 하고 잘 꽂혀진 책꽂이의 책들을 꺼냈다가 다시 꼽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얼마동안 그렇게 흘러가는 듯싶었는데 흐르는 침묵을 누나가 먼저 깨뜨렸다.
“안 춥냐? 이불 속은 따뜻해서 좋은데....”
“예, 괜찮아요,”
“학교 공부는 잘 하고 있지?”
“아니오! 열심히 하겠다 마음은 먹고 한다고는 해도 잘 안되고, 또 잘 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그래, 아무래도 시골아이들보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이 처음엔 더 잘 하는 것 같더라“
“그런 것 같아요. 제 친구들도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많은데, 다들 그렇게 이야기해요“
“응, 그럴 거다. 그건 내가 더 잘 알지. 하지만 꾸준히 하는 아이들은 나중에 더 잘하는 경우가 많더라, 이래봬도 내가 선생님을 했었지 않냐?”
“그래요? 몰랐어요!”
“모를 수밖에........모를 수밖에 없지....”
갑자기 누나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면서 말끝이 흐려졌다.
계속해서 의자에 앉아있기엔 불편하기도 하고 나를 올려다보는 주인댁 누나의 눈빛도 피곤해 보여서 방바닥에 내려앉아 눈높이를 같이하고누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목수 일을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딸만 셋을 낳으셨는데 나는 셋 중에 맏이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부모님의 사랑을 두 동생들보다 더 많이 받으며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엘 다녔지. 형편이 넉넉하진 못했지만 다행히 공부를 좋아해선 지 대학교 때는 학비를 한번도 낸 일이 없이 졸업을 했으니까 부모님께 학비걱정은 끼쳐드리지 않고 학교를 다닌 셈이었어. 아들이 없어서 아주 가끔은 아버지께서 서운해 하시긴 했지만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서 여자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출근하기 시작하던 해까지 우리 집에서 근심 걱정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어.
하지만, 우리 집의 불행은 그 해 여름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부터 시작되었지. 그 날 지붕 위에 올라가서 공사를 하시던 아버지께서 발이 미끄러지면서 떨어지셨는데, 병원에 옮긴 뒤 사흘 만에 돌아가시면서부터 두 동생의 학비와 다섯 가족의 생활비를 대는 일은 당연히 내 몫이 되었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어.
그러니까 내가 학교에 출근을 시작한지 1년 남짓 되던 때, 자꾸만 몸이 아프고 무릎과 어깨의 통증 때문에 약국에서 지어먹는 약으론 견딜 수가 없게 되었을 때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게 되었는데 그 때는 이미 치료시기를 많이 놓친 그 다음이 되어버렸어.
어쩔 수 없이 학교 휴직을 하고 병원에 입원을 해서 6개월 가까이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차도가 있기는커녕 온몸의 관절이 부어오르는데 병원에서 하는 일이란 겨우 통증만 줄여주는 일 뿐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해서 내 스스로 퇴원을 자청하고 내 발로 걸어서 병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지.
아버지께서 남겨놓은 전 재산인 이 집마저 저당을 잡혀서 병원비에 써 버렸으니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두 동생들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서 방직공장에 취직을 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녀야 하는 그런 고생까지 시켜야 했으니, 몸의 통증에 마음의 고통까지 작지가 않아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집도 팔아봤자 빌려 쓴 돈을 갚고 나면 쓸 만한 전세방 하나 얻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두 동생들에게까지 짐이 되어서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 내가 살아있는 날들이 그동안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어.
내가 하루라도 빨리 죽어야만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을 것인데도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질 않으니, 하늘은 왜 나한테만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시련을 주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체념하여 담담한 듯 그러면서도 어떤 땐울먹이느라 말을 잇지 못하다가 애써 추스르면서 겨우 이야기의 끝을 맺는 주인댁 누나가 한없이 애처로웠다.
어두워질무렵 밖에서 주인댁 아주머니께서부르는 소리에절뚝거리며방문을 나서는 주인댁 누나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힘겹게 보였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위로의 말은 커녕 단 한마디도 하지못했던 게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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