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눈비가 내려 아궁이에서 물이 솟아나지 않는 한연탄불 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몸이 불편하여 연탄을 갈 일이 쉽지가 않을 터인데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꺼지지 않도록 챙겨주시는 주인댁 누나가 고마웠지만연탄을 갈다행여 사고라도 나지않을까 하는불안과 걱정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또 한편으론 주인댁 누나에게방과 부엌이어지럽게 널려진 흉한 꼴을 보이 않으려고 학교 갈 시간이 늦어지더라도 그릇을씻고청소는 말끔하게 해 놓아야 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을 택해서 하던 빨래도 작은 것은 가능한 그 날에 반드시 해야 했기에나로선 오히려번거로울 일이 더 늘어난 셈이었다.
이런 것들이 걸려서 어떨 땐 방문과 부엌문을 잠그고 다닐까 생각했으나 처음부터 그렇게 하고다녔다면 모를 일일까이제 와서 새삼스레 문을 잠근다면행여 주인댁 누나가 조금이라도언짢아 할까봐서 그럴 수도 없었다.
어느 토요일,학교가 끝나는대로 곧바로 고향에 다녀오려는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늦잠을 자서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서둘러서 학교에 갔었다. 아침에 쫓기면 하루 종일 쫓긴다듯이고향가는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 늦어져서 책가방만 팽개쳐놓고헐레벌떡 갔다가 그 다음날 늦게 서야 어머니께서 싸 주신 짐 보따리를 가지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밀려있는 빨래,물속에 담가놓은 그릇들, 방 청소...늦더라도 꼭 해야만 할 일들이라서가뜩이나 심난스러웠으나 방문을 열고 전등불을 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깨끗하게 빨아진 빨래가 방바닥에 쫙 펴진 채로 널려있었고 어질러진 방과 부엌까지도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보나마나 주인댁 누나가 아니면이렇게 해 줄 사람이 없어서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빨래 중에 속옷이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빨래와 설거지를 했는지 그것이 더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비료포대에담아주신 고구마를주인댁에 내일 아침에 드릴까 하다가누나가 걱정이 되어 곧 바로 갔다드리며살폈으나고마워하시는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는 순간 별 일은 없는 것 같아 안심은 되었지만 안방을 힐끔거려도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내 방으로돌아온 뒤에도답답하기만 했다.
그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와부엌의 연탄아궁이를살펴보니 불씨가 연탄 맨 위에 아주 조금 남아서 가물거리고 있었다.예전 같으면연탄불을 이미 갈아 놓았어야 맞는데 어디에도그런 흔적이 없어서주인댁 누나가 어떻게 라도 되었을까 하는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혹시 어제 내 빨래를 하면서 뭐가 잘 못된 것은 아닐까 싶어서주인댁 아주머니께 누나가 어디 가셨냐고물어보고 싶었지만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 대문을 나서려다 말고 안방 쪽을 기웃거려봤으나 별다른 기척도 없었다. 학교에서도머릿속엔 온통 주인댁 누나 걱정뿐이었다.
하늘엔 잔뜩 먹구름이 끼어있어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싶더니 점심 무렵부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며주인댁 누나 생각을 하고 있을 때누군가가 내 머리를 쥐어박아깜짝 놀라뒤를 돌아보니 선생님께서 언제 오셨는지 뒤에 서서 눈총을 쏘아대고 계셨다.
다시는 주인댁 누나가 연탄 가는 일과 빨래를 할 수 없도록 부엌문과 방문을 자물쇠로 잠가야겠다고 벼르며, 지루하기만 했던 하루의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하얀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려 모자와 교복 어깨 위에 수북하게 내려앉아 쌓였다.
대문앞에서모자와 어깨 위에 쌓인 눈이 털어질까 봐 대문의 쪽문을 열고 허리대신 다리를 조심히 구부려 들어서는 순간내 방 마루에 옷을 두툼하게 입고 앉아있는 주인댁 누나가 이런 나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마루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님! 춥지 않으세요? 눈이 오는데....“
“옷을 두껍게 입으니 괜찮다. 이제 오냐?”
“어디 아프셨어요?”
“응, 감기기운이있어서 누워었는데 이젠 괜찮아!”
주인댁 누나의 핏기없었던얼굴이예전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누님이 제 빨래랑 다 하셨지요?”
“심심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빨래도 한번 해 보고 싶어서 하긴 했는데 깨끗해졌는지 모르겠다.”
“내 빨래를 하셔서 감기에 걸리셨지요?”
“아니, 그건 아니야! 고구마가 참 맛있더라.” 하시며 내게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화재를 다른 곳으로 돌리셨다.
“예, 어머니께서 주인댁 아주머니께 드리라고주셨어요.”
"부모님께서 고구마 농사를 많이 지으시나 봐?"
"예, 우리 고향은 온 들판이 모두 고구마 밭이거든요!"
주인댁 누나는 들녘에 나가본지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면서 마치 들녘을 바라보는 듯눈내리는 담장너머를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지금쯤 들녘엔 눈이 하얗게 쌓여서 참 멋질 것 같다, 그렇지?"
"고향에 다녀올땐눈은 볼 수가 없었는데 오늘같은 날엔하얗게 쌓였을 것 같아요"
"눈으로 하얗게 덮힌아름다운 들녘을 꼭 한번 보고싶다"
혼자서 나즈막히 중얼거리는 말 속엔 거동이 불편한 주인댁 누나의 간절한 바램이 묻어있었지만들에 나가는 일을 누군가 함께 해준다면 모를 일일까혼자선 될 일은 아니라서 측은하고 안타까운생각만 들 뿐이었다.
"아참, 누님께서 연탄불을 봐 주셔서 연탄불 꺼뜨리는 일이 없어졌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만고맙다는 말을꼭 전해 주라고 하시던 데요?"
"별 일도 아닌데 뭐하게 그런 말을 했냐? 그래서 고구마를 그렇게 많이보내주셨구나?"
"이런 날연탄불에 고구마를 구어먹으면 맛있는데구어 먹을까요?"
"군고구마! 좋지!"
서둘러서 연탄불 위에 고구마를 몇 개 얹어놓고 마루로 나와서 다시 나란히 앉았다.고구마 익어가는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그 시간에 함박눈은 대문 옆에 서 있는 목련의 가지 끝에맺혀있는털보숭이 꽃망울마다 하얀 솜으로 곱게 치장을 해 놓고 있었다.
누나와 함께 마루에 앉았었던때가 사흘 전이었는데 그 사흘이 내겐 정말 긴 시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행여, 나의 일로 주인댁 누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걱정때문이었으나 이젠안심이 되었다.
연탄 아궁이에서 익어가는 고구마를 작은 것부터꺼내놓고 껍질을 벋겼으나 그냥 먹기엔 아직은 뜨거웠다. 그러나먹기좋을 만큼 적당히 식기까지 기다리기엔구수한 냄새가입안가득 군침을 돌게 해서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한입씩 베어물고는입안에서 식히느라호호불어대는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이곳에 이사를 온 이후주인댁 누나가 지금만큼 즐거운 표정은 오늘처음봤다. 사흘동안 내 안에 있던 걱정이 한꺼번에 씻은 듯 사라져서 모초롬 마음편안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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