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편집.
일기에 대한 내가 갖고 있는 관념은 매일매일 꼬박꼬박 이라는 성실성과, 꾸준히 라는 연속성 및 꾸밈없는 진실성 그 세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엔 아직도 변함이 없다.
그런 관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내키거나, 또는 할 일이 없거나, 아니면 특별하게 기억으로 남겨야 할 일이 있을 때, 그 날 아니면,며칠 후에라도 마음 편하게 게으름 마음껏 피우며 써 왔으니, 성실성 측면에서 볼 때 내 일기는 처음부터 아니었다.
비록 거드름 피우긴 했어도병에 담겨있는 잉크를 팬으로 찍어서글씨를 쓸 무렵에 시작해서컴퓨터 시대까지 흘러왔으니,그 동안 늘어나서 쌓인 일기장의 부피가 열권을 훌쩍 넘긴 것은 그만 두고라도 그 글을 쓰는 도구의 진화과정의 역사 하나로만 볼 때 내심 자부심이 느껴질 때가있다.
또한, 내가 살아온 날들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특별하게 굴곡지거나 그렇다고 아주 아무런 일도 없이 아주 순탄했던 삶은 아니었지만,이 세상의 번뇌를혼자서 다 짊어진 것처럼일기에 모두 쏟아놓았던건 내 감정에 너무 충실했던 때문이 아니었겠냐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변명을 하곤한다.
만약 이런 내 일기를다른 사람들이볼 일이라도 생긴다면유치하기만 했던 나의 생각들로 인해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를 일이라서이런 부끄러운것들을들키지 않으려고 일기장은 언제나 책장의 가장 깊숙한곳에 쑤셔 넣곤 했었다.
그러나부피가 적을때에는 책꽂이의 아무 곳에나 꽂아놓아도상관없었으나 세월이 흐름에비례해제법 넓은 자리를 차지할 때쯤에 이르러선타인의눈에 띄지 않는 곳이 어디인지두리번거리곤 했었지만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쉬울 일이긴 해도언젠간내 삶이 끝나기 전에 어차피 내 손으로 없애고 떠나야할 흔적들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내 삶의 끝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의식 또한아직은 또렷하여 써야 할 것들도 있을 터에지금 당장에 없애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서그동안 써놓았던 것들은 컴퓨터 디스켓에 집어넣고선 남은 쭉정이는없애버리기로 마음을 굳혀먹었다.
내 삶에 크게 흠이 잡힐만큼의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남의 일기장 속에는 뭐가 씌어있을까 하는 호기심은 누구에게나생길 일이라서처음부터 남의 눈에 띄지않게 보관하는것도타인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얼굴 뜨겁고 부끄러운 말들을 모두 삭제해놓고 보니날짜와 날씨만 덩그러니 남는 날들도있어서 이런재미없는 일을괜히 시작했다는 후회도 생겨났다.일주일 만에겨우 한 권의 작업을 끝내고두 권 째를 열려는데겉 표지 안쪽에 대학노트를 잘라내어 반으로 접혀진 채로끼워져 있는종이가 있었다.
"이것은 뭘까?" 하며종이를 펼치는 순간,저절로 아! 하는 긴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 동안아주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으나30년이란세월이 흐르는 동안색깔만누렇게 탈색이 되어있을 뿐잉크로 또박또박쓴 글씨위로얼룩진 자국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편지가 나의 옛 기억을 새롭게 한다.
내 어린시절, 시골뜨기가 도시의 골목길 허름한 집의 작은 방에 자취를할 때생전 처음으로 남의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일을잊어버렸을리가 없다. 까마득히 오래된 일이지만 나는그 때 쓴일기를 다시 읽지 않더래도그 무렵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생하게기억해 낼 수가 있을 것만 같다.
1969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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