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 30, 수요일)
타지방에서 나고 자란 직장 동료가 나의 시골 이야기를 듣던 중
말을 가로채며 '삐비가 뭐냐'고 묻길레
'띠에서 새순이 나올 때 피는 꽃'이라고 대답을 해 줬더니
자기의 고향에선 '삐비'라 하지않고 '삘기'라 한다고 일러줍니다.
배가 고프던 시절
일년 중에 가장 먹을거리가 궁할 무렵
아이들이 손수 산이나 들에서 얻을 수 있는 썩 괜찮은 간식거리였기에
삐비가 돋아나는 곳이면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던 일은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슴속 깊히 간직하고 있는 아련한 추억입니다.
삐비를 뽑아먹던 우리 세대들 보다 훨씬 더 어렵고 궁핍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을 하셨다던 부모님 시절의 그 草根이
바로 띠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잡초 중에 띠만큼 억척스럽게 뿌리를 뻗어 자리를 차지하는 놈들도 없어서
요즈음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있어선 한없이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일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담하고 포근했던 감방산 자락의 첫동네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산 중턱쯤의 서당터라 불리는 곳엔 봄이면 삐비가 지천으로 돋아나곤 해서
아이들면 누구라 할 것 없이 그곳으로 달려가
새끼손가락 만큼이나 통통하고 세뼘도 더 될만큼 큰 삐비를 한 웅큼씩 뽑아 오곤 했습니다.
삐비의 껍질을 벋겨 내서 모은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을
한 입 가득 넣고 씹어먹을 때 달콤했던 그 맛과 향긋한 풀향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껌이 귀하던 시절이라
누군가 "삐비를 오래 씹으면 껌이 된다"는 말에
삼키고 싶은 마음 짙누른 채 질겅질겅 씹어보지만
결국엔 입속에서 다 사라지고 마는 삐비였습니다.

이 처럼 아이들의 놀잇감이나 간식거리가 되어주었던 삐비도
때를 놓쳐버리면 속살이 쇠어버려서 뽑았더래도 먹지 못해 버릴 수밖에 없었고,
이 때가 더 지나면 하얗게 피어나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아이들에게 있어선 쇠기 전에 뽑아먹지 못한 억울함으로 남겨지곤 했던 삐비였습니다.
그저께 석양에 아내와 고향 산소에 제초를 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해마다 돋아나는 띠를 뿌리채 파서 버리는 일을 계속해서 해 왔기에
이젠 우리 산소에서 만큼은 없어졌을 거라 생각했던 띠가
이곳저곳에서 당당하게 꽃을 피워놓고 나를 비웃고 있습니다.
내 어릴적 삐비를 뽑아먹던 생각을 하면
반가운 마음에 그 자리에 자라게 두고싶은 마음도 없질 않지만
만약 그랬다간 몇년만 지나면 산소를 다 차지하고 말 녀석들이라
삐비가 뭔지도 모르는 아내에게 나의 옛 추억을 주절거리며
일일이 뽑아내야만 했습니다.
하도 억척스러운 녀석들이라
쫓아낸다 해도 또 다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올 게 뻔한 일이고
산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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