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망종(芒種)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10:19

(2004,6월 05일 토요일)

오늘이 바로 망종(芒種)입니다.
예전에 나의 부모님께선
"이 절기가 지나면 보리가 더 이상 영글지 않으므로
보리베기 준비를 서둘러야 할 때"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24절기 중의 하나인 "망종이란"
까시러기가 있는 곡식, 즉 보리는 먹을 때가 되었고
벼(모)는 자라서 논에 심어야 하는 시기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 특히 60년대 이전에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이맘때의 어려웠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느껴지는 감회가 작지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띠뿌리와 소나무껍질(=草根木皮)로 끼니를 연명하셨다던
우리들의 부모님세대 보다는 훨씬 더 풍족한 시대를 살았다고는 해도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어보고 싶었고,
흰 쌀톨이 섞인 밥이 부러웠던 시절을 살아왔던 만큼
달력에 있는 "망종(芒種)"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의 느낌이
다른 절기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기만 합니다.

일년 중 먹거리가 없어서 가장 힘겨웠다던 때가 바로 망종무렵이었기에
이를 "보리고개"라고 했다지만
요즈음 들녘 풍경은 그 흔했던 보리밭을 구경하기조차 쉽지가 않습니다.




식량으로서 없어서는 절대로 안되었던 보리가
이미 오래전에 식탁에서 쫓겨났던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돈이 되지않는 작물이 되어버렸으니
들녘에서도 설 자리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식탁 가득 음식을 차려놓고 편식한다며 꾸지람을 해대고,
우유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서 집을 나서는 요즘 아이들에게
옛날의 보리고개 이야기를 들려주며 반면교사를 삼으라 해 보곤 하지만
옛 이야기를 한갖 잔소리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요즘 아이들이고 보면
녀석들이 실감있게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서운하다는 생각은 그리많이 들지가 않습니다.

며칠 전 고향가는 길에서
내 친구가 살았던 마을이 보이는 언덕베기에 다달았을 때
그 언덕베기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넓은 보리밭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한참동안이나 옛 생각의 감회에 젖었던 일이 있습니다.

설익은 보리모개를 꺾어다 구울 때
생솔가지 타는 매운연기에 콜록거리면서도
행여 친구가 하나라도 더 먹을까봐 눈 부라리며
손 뜨거운 것 아랑곳하지 않고서 불 속에 있는 보리모개 꺼내 비벼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입에 넣고 씹을 때의 구수한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매운 연기 탓에 흘러내린 눈물과 콧물,
숯검뎅이로 범벅이 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손가락질 하며 웃었던 일들이
남아있는 옛 추억속에서 아련히 떠오릅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저 언덕아래에서
친구들이 불어대는 보리피리 소리가 들리는 듯,
그곳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개를 길게 빼고 기웃거려 보는 내 자신의 하는 짓이 우습습니다.

바닷가 마을의 친구가 살았던 초가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지은 번듯한 집이 거만스레 버티고 서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에서는 오히려 빈곤과 허전함과 아쉬움이 적지않은 것은
언뜻, 신기루처럼 나타났던 그 시절의 평화로운 풍경과 정겹기만 했던 친구의 옛모습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망종인 오늘,
비록 내 아이들이 옛 이야기 귀담아 들어주지 않더래도,
또한 내 옛 친구들의 모습이 기억속에 아스라이 가물거린다 해도,
보리쌀 잘 끓여서 지은 보리밥 한 그릇과
묵은 된장에 통통한 고추와 시원한 물 한대접 식탁에 올려주는 그런 아내와 함께
옛 이야기 주절거리며 오늘하루 단 한 끼니만이라도 같이 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을 일은 없겠습니다.

곰국 끓여놓고 모임나간 아내는 언제 돌아올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