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홀로 여행을 떠나는 친구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7:46
( 2003년 02월 22일 토요일 )

국민학교를 졸업할 당시에 대부분의 여자 동창들이
신체는 물론 의식까지도 조숙했던 탓에
같은 동창 머스마들에겐 친구로 조차 여겨 주지도 않았으나,
그 친구는 일찍부터 외지로 떠나 살았던 탓인지
고향 친구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항상 반기곤 해서
대하기가 편했던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는 졸업 이후 헤어진 뒤부터 그 친구가 결혼을 한 몇 년 뒤까지도
나와는 꽤 오랫동안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던 사이였기에
내게 있어서는 어떤 남자친구들 보다 더 정겹던 친구였습니다.

편지가 왕래하던 꽤나 긴 시간들 동안
서로의 고민거리도 털어놓고 위안을 주고 받으며
다른 친구들의 소식과 함께 살아왔던 어릴 적 고향 이야기도 하면서
좋은 우정을 나눴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 친구를 만났던 일은
결혼을 해서 이웃마을인 친정에 왔을 때 한번,
그리고 몇 년 전 그녀의 친척이 별세했을 때 문상을 가서 한번 등,
졸업이후 두번을 만났지만
편지가 오갈 때처럼 편하게 느껴지던 친구였습니다.

그리고선 내가 결혼을 한 이후로 차츰 소식이 뜸해지기 시작하여 아주끊긴 이래
30여년 후인 지난 해 국민학교 동창회가 생기면서 부터 다시 연락이 닿게 되고
모임이 있을 때마다 만날 수가 있었고
옛날의 편지 대신 전화로 안부가 오가게 되었습니다.

어제 초저녁엔 그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이웃에 사는 친구들 다섯명이 1박 2일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기차역으로 나가는 길이라며
저녁 열시쯤에 목포역에 도착해서 찜질방 아무곳에서나 하룻밤을 지내고
내일은 가까운 섬에 갔다가 저녁기차로 다시 올라가겠다고 해서
"서방님은 어떻게 하고 밤기차를 타겠다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나이 50에 이런 자유도 없으면 어떻하냐며 오히려 내게 묻습니다.

내 친구, 여자 나이 50,
삶에 묻어있는 찌꺼기를 훌훌 털어내기 위해서
서방님을 집에 홀로 남겨놓고서
밤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날 수 있는 나이,

여행이란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데 의미있는 일이고 보면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을 일이며,
홀로서 야간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거나
부인을 보내놓고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으며
새로운 날을 준비할 친구 부부가 부럽게 느껴지는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친구의 여행소식을 들으며
"아내가 큰 냄비에 곰국을 끓이기 시작하면 긴장을 해야한다"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 건,
아내가 여행을 떠나고 홀로 남겨진 채
가슴 한 켠에 일렁이는 찬 바람을 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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