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춘란 소심이 꽃피는 날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7:44

(2003년 2월 21일)

지난 해 이른 가을에 꽃대를 올렸던 春蘭들이
며칠 전부터 꽃대를 성큼성큼 위로 밀어 올리더니
간밤엔 소담스레 꽃을 피워놓고
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제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춘란 중에서 素心은
아무런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純白의 혀(舌)와
순록의 꽃잎이 조화를 잘 이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순박한 느낌을 갖게 하는 꽃이며
이에 매료되어 소심만을 기르는 이도 있다고 합니다.

춘란은 꽃의 크기, 향기, 모양, 색갈 등으로 비교해 볼 때
양란에 비해 정말 보잘 것 없는 풀포기입니다.
일년내내 공들여 키워 힘겹게 올린 꽃대엔
손톱만한 작은 꽃 하나를 겨우 피워 내면서
꽃또한 하고많은 색 중에 하필이면잎과 같은 녹색으로 피어나향기마져 없다보니
제가 감히 "보잘 것 없는 꽃"이라는 표현을 주제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있는 듯 없는 듯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변화를 하며
항상 봐도 싫증이 나지않은 귀한 자태에 마음이 끌려
하차잖은 풀포기에 빠진지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이 녀석들은 평소엔 강인함과 끈기로 잘 자라줘서 보람과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보살핌을 소홀히 할 땐 어김없이 문제를 일으키곤 해서
하루라도 애정어린 관심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꽃대가 올라와 있는 놈들은 꽃을 본 다음에 하더래도
나머지 녀석들은 오늘부터 분갈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분갈이란 묵고 썩은 뿌리를 잘라내고
새 흙(난석)으로 바꿔줌으로써 보다 건실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 작업은 반드시 녀석들이 동면에서 깨어나기 전에 이미 해줬어야 할 일이나
게으름 속에 안주를 하거나 쫓기는 듯 허둥대며 시간만 흘려보내고선
하차잖은 풀포기에게까지 따가운 눈총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 수록 망각 또한 잘 해서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40대엔 시속 40km, 50대엔 시속 50km의 속도로 빨라진다고 들 합니다.

춘란은 제 때를 알아 새 촉을 올리거나 꽃을 피우는데도
나이들어시간의 흐름에무뎌진 내 자신을 위한 변명에
유치하리만큼 애를 쓰고 있습니다.

소담스레 피어난 素心을 바라보며
성큼 가깝게 다가와 있는 봄을 느낍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純白의 素心을 닮았으면 하는 바램을
상큼한 새벽공기와 함께 담아서 보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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