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눈 쌓인 금당산의 아침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7:40

( 2003년 1월 23일 )

한 겨울에 다섯시면
여명이 오기까진 아직도 두어시간이나 남아있는 깜깜한 밤입니다.

내가 농사꾼이거나 날씨에 따라 하고 못할 일이 있는 것도아니건만

새벽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짓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 하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간밤에 눈을 내리던 먹구름이 흔적없이 사라진 하늘엔
초롱한 별들이 밤을 새워 운행을 계속하고,

아파트 마당엔
소복이 내려쌓인 눈위로
집나간 고양이의 발자욱들 만 어지러이 널려있을 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아직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날
눈 쌓인 산 위에서 아침을 맞는 기분을 미리 생각하며
옷가지 주섬주섬 주워입고
지척에 있는 금당산엘 가기 위해서 밖으로 나섭니다.

오랜만에 발목까지 차 오르는 눈길을 걷노라니
내 어릴 적,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밤이 지나새날이밝아올 때면
학교로 가는논둑길에 쌓인 눈을 가래로 치우고 오셔서

가마솥 아궁이에 꽁꽁 언 손과 발을 녹이시던 내 아버님 모습이 선합니다.

눈덮힌 하얀 신작로를
두툼하게눈을 얹은 채 엉금엉금 기어가는 자동차를 보며
잠에서 덜 깬 배고픈 두더쥐의 모습을연상하며 웃다가

발을 헛디뎌엉덩방아를 찧고 맙니다.

이런 땐 어릴 적 생각하며눈속에 푹 파묻혀 봐도 좋으련만
얼른일어나 누가 보는 사람은 없는지두리번거리며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내가 또 우습습니다.

어젯밤 늦은 귀로의 가로등 불빛 조명을 받으며 현란한 춤을 추던 눈발은
금당산 숲속 나뭇가지마다 촘촘히 꽃을 피워 밤을 지새고
삭풍은 어디에선가 숨을 죽인 채 긴긴 밤을 지켜만 보고 있었나 봅니다.

여느때 이 시간 쯤이면
새벽잠을 잃어버린늙은이들이
어느때 부턴가 발길이 뚝 끊어져버린한 늙은이를 이야기 하며
가느다란입김길게 내 뿜곤 하던 팔각정엔
인적은 하나없고 무거운 정적만가득합니다.

금당산 꼭데기에 숨가프게 오르면
어느 종친회의 이름을 새겨놓은 거만스러운 깃대봉이 있고
그 깃대 끝엔 밤이건 낮이건 눈비가 오건말건 매달린 채
빛이 바래고 찢겨져 누더기가 된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습니다.

산 꼭데기엔하늘과 구름과 바람말고는 아무것이 없기를 바램하는 것은

나만의외곬스러움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 세운 깃대에 깃발을 달아 놓을 일이라면

살피는 일 또한 그들의 몫일진데
깃발이 누더기가 되든 말든 그대로 두는 것으로 봐선

그들만의 영달을 바램하는 주술적인 취지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찢겨져서 누더기가 된 깃발에 상처입은 마음을 추스리려
솔가지에 소복히 쌓인 눈을 퍼다 세수를 하니
흐르는 땀과 함께 괜스레생겨난 잡 생각까지도 말끔히 씻어내립니다.

여명이 무등산 능선을타고 아래로내려오는 사이에
눈 덮힌 도시는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그 시간,

나는 새로 열리는또 다른나의 하루를 위해
무등산을한아름 안을 듯두팔벌려심호흡 크게 한번 하고

내가 남겨놓았던발자욱들을 다시 밟고 금당산을 내려옵니다.

오늘도 눈에 덮힌 금당산의 숲속만큼 아름다운 날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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