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시골 촌놈들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7:25
( 2003년 01월 02일 목요일 )

시골 친구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면
촌놈들 아니었다 할까봐 어김없이 옛날 이야기를 화잿거리로 올려놓습니다.
아주 가끔은 정치니 경제니 하며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촌놈들의 옛날 이야기가 시작되면 발도 붙이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맙니다.

바닷가에서 조개나 게를 잡던 이야기에서 부터
오후반임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학교에 간다고 나와 바닷가 백사장에서 놀다가
오전반 아이들이 끝나면 학교에는 가지않고 집으로 되돌아와서
그 다음날 단체로 벌을 서던 이야기까지
식당 주인의 눈치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칠 줄 모릅니다.

가난에 찌들었던 친구가 자수성가를 한 뿌듯한 이야기,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안타까운 친구 이야기,
한 교실에서 6년동안을 함께 살았으니 옆자리에 앉았던 짝꿍이야기,
이젠 50줄에 훌쩍 턱걸이하거나 올라앉아버린 사람들이기에
어느 해부터는 자식들 자랑도 단골메뉴로 등장하곤 합니다.

도회지로 나온 뒤 사귄 친구들을 만났을 때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얽히고 설킨 현실속의 이야기 보다는
한 마을에서 함께 가난했던 시절 함게 지냈던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고 신이 나는 건 시골친구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나는 가끔씩 가난한 시골마을을 고향으로 뒀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도시의 찹쌀떡과 뻔데기를 외치는 소리보다
시골의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더 낫다는 게 아니라
수수대로 엮은 울타리를 헤집고
떡 한볼테기 이웃에 들이밀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 용돈을 타서 튀김과 찐빵과 만두를 사먹었던 기억보다는
부모님께서 가마솥에 익혀주신 감자나 고구마 쪼개어 나눠먹었던 기억들이,
콩나물시루의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던 이야기보다는
먼지나는 신작로에서 트럭 운전수 아저씨가 학교까지 태워 주었던 이야기가
더 정겹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
지난 날들의 추억들을 자꾸만 되새김질 하는 뜻은
그곳을 떠나온 이후의 힘겨웠던 삶들을 당당히 헤쳐나온 대견스러움도 있겠지만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옛 풍경들과 사람들과 추억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가난함도 배고픔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던 시간들이라서,
또 세파에 물들지 않아 순박했던 때의 기억이라서,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채 살갑게 살았던 사람들이라서,
눈을 감아야만 더 선하게 보이는 풍경들이라서
촌놈들에게 있어선 그 무엇보다 값지고 소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난이 자랑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동네에서 작은 것도 쪼개어 나눌 줄 알았던 시간들 만큼은
그곳을 떠나 온 이후 거친 세상을 살아 온 촌놈들에겐
서로에게 자랑거리이자 대견스러울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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