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8. 11:43

( 2001년 08월 24일 금요일 )

낮엔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매미가,
밤엔 풀 숲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계절이 바뀌는 그 문턱에 와 있음을 느낍니다.

십 수년동안을 애벌래로 살아오다가,
날개를 달아서 한 해의 그 여름만 우짖고 일생을 마감한다는
매미의 기구한 삶을 생각하면,
한 여름동안 귀가 따갑도록 울다가 지친 듯
이젠 한풀꺾인 듯 한 그 울음소리가
처량하고 또 가엾기도 합니다.

지난번 고향 바닷가 백사장에서 있었던 친구들의 모임 길에서
일찍심은 벼가 벌써 고개를 숙이려 하고
늦여름의 햇볕에 익어가는 고추의 빨간빛이 더욱 짙어져가는 광경을 보며
가을도 멀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황토밭에서 한 여름동안 무성하게 뻗었던 고구마 줄기와 잎사귀도
눈부신 햇살에 지친 듯 축 늘어진 모습이 힘겨우나
땅 속 줄기에 달려 있는 고구마의 알맹이는
토실하게 살찌우며 영글어 가느라 여념이 없을 때입니다.

내 어릴적 이맘때 쯤이면
밭에 김을 메러 가셨던 어머니께서 저녁을 지으러 집에 돌아오시는 길에
고구마 이랑에 배부른 듯 땅이 갈라진 곳을 헤집어

토실하게 자란 고구마를 캐 오셔서 밥솥에 얹어 익혀주시곤 했던 모습과
모시적삼에서 베어나오는 어머님의 땀냄새가 그리워집니다.

늦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
뜨겁게 달궈진 백사장의 열기에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오랜만에 만난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들과
풍성한 결실을 맺기위한 대자연의 배려라 여기니
이런 뜨거운 하루도 더 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부터 들려오던 소쩍새의 울음소리도
언제 부턴지 들리지가 않는 걸 보면
그 녀석도 가을이 가까이 와 있음을 느끼고선
벌써 먼곳으로 떠나버렸나 봅니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가을을 기다리곤 하지만
언제부턴지 무더워서 싫기만 했던 여름이 떠나감을 아쉬워하곤 합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니
땀을 제대로 흘리지 않고 여름을 보냈을 땐
아무리 좋은 계절인 가을도 기대했던 만큼 풍성하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
꼭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없는지 두리번 거리거나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
뭔까 쫓기는 듯 허둥대는 뜻은
내가 바램하는 그런 가을을 맞이하고 싶은 속마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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