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춘란에 물을 주며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8. 11:41
( 2001년 06월 14일 목요일 )

봄빛이 화창한 날
盆위로 春蘭의 새촉이 뾰족하게 고개를 내밀면
일년동안 애타게 기다린 이가 나를 찾아온 듯
반갑고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녀석들은 게으른 탓인지
봄이 다 가고 여름의 초입에 이르러서야 새촉을 올리곤 해서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곤 합니다.

이처럼 기다림이 지루했던 만큼
한 분에 한촉이 아닌 두 세촉씩 올라오면 좋으련만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분에 한촉씩만 올려 놓는 모습을 보며
녀석들을 향해 아쉬운 듯 눈총을 보내곤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장마가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무더위와 과습에 견딜 수 있는 耐性도 갖춰야 할 일이라서
여러 촉이 한꺼번에 올라와 연약하여 시달림을 받는 것 보다는
비록 한촉이지만 튼튼하게 자라는 것이 더 유리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쉬웠던 마음도 추스리곤 합니다.

蘭石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새촉을 바라볼 때마다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지 않고 잠을 자는 듯 정지된 모습이라서
나처럼 성질이 조급한 사람으로선 답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춘란과 함께 했던 지난 날들 동안
느림보 거북이처럼 더디게 자라는 녀석들을 보면서
이들과 처음 만난 이후 함께하며 지나 온 시간들 속엔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튼튼하게 자라는 당당함과,
연약하지만 잘 버텨내며 견디는 끈기와,
병약한 모습에서 끝내 쓰러지고 마는 안타까움과,
시달림에서 벗어나 차츰 생기를 찾아가는 의연함이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상쾌한 이른 아침에 春蘭에 물을 주는 마음은
지난 해 여름처럼 올 여름의 무더위도 잘 이겨낸 뒤
초가을엔 뾰족히 꽃대를 올리는 녀석들을 미리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로 바라 보는 마음이 정겹습니다.

이제 앞으로 오는 날들 또한
애정어린 나의 보살핌 속에
한 녀석도 도퇴됨이 없이 튼튼하게 잘 자라서
해마다 탐스러운 꽃을 피워주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그래야만
"죽더래도 자연에서 죽게 놔둬야 한다"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놔뒀으면 죽어없어질 녀석들을 집으로 가져와 살려놨다"라는
변명아닌 변명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