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오는 길을 가까운 나주쪽을 택하지 않고 현경면 소제지에서 현화를 지나
함평쪽의 먼 길을 택했던 것은 내심 두가지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내가 살았던 현화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없는 그녀에게
친구들이 살았던 동네가 어디쯤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서다.
노두목 바닷가를 지나오면서
"저 건너편 아스라히 보이는 작은 동네에 맹금, 두석, 영상, 수복이가 살았고,
은숙이네 옛 집이 저기고, 현화 5구는 여기, 3구는 저쪽,
그리고 저쪽 산 밑 동네는 내가 살았던 곳 4구......."



아주 실감나게 설명을 해 줘도 생소할 수밖에 없는 그녀에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 기억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옛 생각과 옛 풍경 속에
내 스스로를 흥건히 젖게 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열심히 주절거렸다.
이런 내 속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열심히 들어주는 그녀가 고마울 일이다.

또 하나는, 여름의 끝자락에 피어나서 산골짜기 전체를 빨갛게 물들인다는 꽃,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가슴아플 꽃,
잎과 꽃이 평생동안 만나지 못해 애타게 그리워만 한다해서 붙여진 이름 상사화,

그 꽃이 만개했을 때를 맞춰서 그 산골짜기에 꼭 가보고 싶었으나
그곳에 갈 때마다 번번히 때를 맞추지 못해 아쉬워했던 기억들.....
잘 하면 그 꽃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에게 의향도 묻지 않은 채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어릴적에 "산중"이라는 곳에 사시는 집안의 아저씨벌 되는 분들께서
곧 잘 우리집에 오시곤 했다.
아주 가끔씩은 아저씨를 함께 따라왔던 쬐끄마한 아이가 나랑 동갑내기였지만
나 보다 생일이 몇 달 빠른 탓에
어머니의 추상같은 불호령으로 마지못해 형이라 불러야만 했던 억울했던 일도
내 기억속에 아직까지 또렷히 남아있는 그 산중이라는 곳.......

그 "산중"이 함평군 해보면이라는 것을 안 것은
우연히 "용천사"라는 곳에 드라이브를 갔었던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광주의 송정에서 월야를 지나 문장을 막 벗어나면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곳 이정표대로 좌회전하여 인적하나 없는 산 속 길을 약 7km정도 더 가면
산골짜기 끄트머리쯤에 용 한마리가 하늘을 향해 물을 뿜고 있는 아담한 저수지,
바로 그 저수지 위엔 용천사라는 절이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첩첩히 겹쳐진 산 뿐이니
"해보" 보다는 "산중"이라는 지명이 더 살갑게 느껴지는 곳,
우리집을 다녀가곤 하셨던 아저씨는
지금쯤 이 산 속 양지바른 어드메쯤에 고이 잠들어 계시리라.

세상 모든 일이 바램대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확신 보다는 혹시나 하는 불확실성의 기대를 갖고 왔었던 것이 한편으론 다행스러울 일이다.
해질녘이라서 바쁘게 달려왔던 용천사 계곡으로 가는 길목엔
"꽃무릇 축제 - 9월 10일부터 12일까지"라는 현수막이 우릴 반겨맞을 뿐
꽃 한송이 피어있지 않은 계곡의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하도 아쉬워서 숲속에 올라가 흙을 헤집거리는 순간
통마늘보다 작은 알맹이들이 깊은 잠에 취한 채 아직도 깨어날 생각조차 않고있다.

이 놈들은 참으로 묘한 놈들이다.

현수막에 써진대로라면 보름쯤 후에 일제히 꽃대를 올리며 꽃을 피워댈 것이다.
그리고 꽃이 진 가을날에 파란싹을 올리고 추운 겨울동안 무성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봄이되어 온갖 생명들이 새 잎을 올릴 때 이 놈들은 잎을 떨구었다가
여름엔 다시 흙속에 몸을 감추는 짓을 반복할 것이다.

이 처럼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꽃무릇,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꽃무릇에 애틋한 이야기로 포장을 하여 상사화라 이름을 부쳤겠지만
꽃 치고는 아주 짜임새가 있거나 썩 아름답게 느껴지지도 않는 이 꽃이
봄에 뿌리를 내려 싹을 올리고 여름과 가을에 꽃을 피우는 다른 생명들에 비해
조금은 특이한 삶을 살아가는 탓에 서글픈 이미지로 기억되는지 모를 일이다.



1년만에 딱 한번 만났다가 헤어져야 하는 견우와 직녀의 별 이야기와
한 몸에 붙어 살면서도 일생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해 이름지어진 상사화의 꽃이야기 중
어느것이 더 슬픈 것인지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꽃은 꽃대로 별은 별대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서로 다른 애틋함으로 곱게 자리메김 되어있으면 될 일이니까.....


하루종일 장대비가 쏟아지던 지난 9월 11일 토요일,
상사화 축제가 열린다던 그날 혼자서 그곳엘 갔었다.
비가 쉼없이 쏟아진 탓에 사람들이 많지가 않아서 좋았지만
양지바른 곳만 상사화 꽃이 듬성듬성 피어있을 뿐
대부분은 이제 막 꽃대를 올리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서로 때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것은
상사화의 잎과 꽃이 그렇고,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 또한 그렇고,
그녀와 아내에게 꽃이 핀 풍경을 보여주지 못한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아쉬움 남긴 채 발길을 되돌릴 수 있는 이유는
"언젠가는"이란 불확실성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2004, 9,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