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다시 길을 나서는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10. 6. 22. 06:05

인생이라는 길을걸어오는동안불쑥크고작은 굴곡들을 만날 때마다

비켜걷지 아니하고의연하게딛고 지나야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건 우직하여 지혜롭지 못해서가 아니고

또한 내 혈기가 아직도 뜨겁다거나 늘 자신감이충만해서가 아니라

숱한 경험에 비춰볼 때

비켜 지나온일은 언젠간 다시 되풀이되곤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간혹견디기 힘들만큼 심사가 어지러울 때도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엔 당당하게걷는내모습이 스스로에게대견스럽기만 했었습니다.

그날 그 순간까지는 그랬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불어닥친모진 광풍에

찢기고꺾여진 채내팽개쳐진초라한 모습이 하도 부끄러워

마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를 어둠속에갇워놓은 채

마음의 문을꽁꽁 걸어 잠궈야만 했습니다.

어둠이란 것도 처음에만답답하고 불편할 뿐

익숙해지고 나면 살아가는데 있어그리 큰 문제도 없다는 걸,

내 자신을내 보이기 싫을 땐이보다 나은은신처도 없다는 걸,

스스로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경우라면

가끔씩은 어둠속에 머물러보는 것도 그리 나쁠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과연 나는 이 세상에 얼마만큼 필요한 존재였는지,

나의 모든 인연들로 부터얼마만큼의 덕을 쌓고 살아왔는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은둔의 시간동안세상사에 눈과귀까지 꼭 닫고 살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누더기가 되어 초라해진내 자신을먼저 추스리지 않고선

드러내는일이 인연들에게누가 되고세상에 부끄러울 일이라 여겨져서

세상으로부터 부르는 소리와 오라는 손짓에 귀를 막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둔이라 말은 했으나

따지고 보면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려서

어둠이라는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견뎌내기 힘든오한으로 웅크리고 있었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세월만큼 명약도 없습니다.

뼈를 깍아 낸 뒤 염증이 계속되어 심난스러울 때도,

벗을먼저 떠나보낸 뒤의 아픔까지도

멈추고덜어내 준 건 약이 아니라 세월이었으며,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건 모진세파가 아니라 내 자신 스스로였다는 걸,

또한 이 일은내 삶의 과정 중에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준 것 또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세월은

어둠속에몸을 사리고 있던 내게

가던 길로 다시 들어서야만 한다며자꾸만등을 떠밀어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거창한 철학적인 명제를 앞세우지 않더래도

종교적 신념을갖고 실천하는 삶이 아니라면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게세상살이의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어

어려운 손님처럼세상으로 가는 대문 앞에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조심스레 문을 밀치니

빗장이 굳게 채워져있을 것만 같았던 대문이 삐그덕하고 열립니다.

그소리에흠칫 놀라 몸을 움추리면서도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를 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내딛는 첫 발이 무척이나 두렵고 조심스럽긴 해도

넘어지지 말고앞으로만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나도 몰래 옷매무새가 여며집니다.

힘이 없어서 비틀거리는 내 모습이

우스울지는 모르겠습니다.

2010,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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