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고향에서 마치고 도시로 나와 중학교를 다닐 무렵엔
고향과 도시는 덜컹거리는 버스로 한 나절도 훨씬 더 걸리는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그 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내와 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모님께서 기다리시는 고향집에 가던 날
간밤에 내린 눈으로 길이 막혀 택시는 커녕 하루에 두어번 다니던 버스마져 끊겨
읍내에서 이십리도 더 되는 길을 걸어야만 했던
오가는데 있어선 참으로 불편하기만 했던 고향길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가끔씩 아내와그 날을 되새김질 할 때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부와 신랑이
축복인냥 내려주는 눈을 맞으며 하얀 신작로를 걸어가는 풍경이야 말로
한 장의 멋진 그림이 아니었겠냐고 우겨보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눈보라에 손과 발이 시려워 오들오들 떨며
읍내에서 이십리 눈길을 버선발로 걸었던 아내의 무용담이 시작될 때면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멋적은 웃음으로 대신할 뿐입니다.
그렇게 불편하기만 했던 고향땅에
몇 년 전 비행기가 오르내리는 공항이 생겨나고 고속도로까지 시원하게 뚫려서
지금은 승용차로 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갈 수 있으니
비록 옛 모습 옛 정취는찾아 볼 수도 없어 아쉽긴 해도
오가는일만 따지고 보면 그토록 편할 수도 없습니다.
엊그제 이른 퇴근을 하고서 아내와 고향에 잠깐 들렀을 때
감을 따서 포장작업을 하시던 누님께서
"지금껏 지어 본 감농사 중 제일 풍년이지만 값은 또 가장 헐값"이라며
한숨을 내 쉬십니다.
태풍없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햇살이 따뜻해서
과수마다 풍작이라 값이 쌀 수밖에 없겠다면서도
한 상자 팔아 인건비, 비료와 농약값, 운송비, 상자값, 공판장 수수료 등등을 떼고 나면
남는 건 늘어 난 주름살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누님이 가엾기만 합니다.
며칠 전 피아골 출사를 다녀오던 길에
좌판에서 視野님께서 샀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감이
그 보다 더 헐값에 팔리고 있다는 게 속이 상해서
몇 상자라도 차에 싣고 가서 아는 사람들한테 팔아 드리는 게 어떠냐며
아내의 눈치를 살핍니다.
파는 일 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자마다 감 몇 개씩 더 얹어 담더라도
까다로운 작업과정을 생략할 수 있고
수송비와 수수료는 아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아내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하여
부랴부랴 감을 따서 선별작업을 마치고 상자에 담아
승용차 뒷자석까지 빽빽하게 실으니
무려 20여 상자나 됩니다.
떠나오는 우리를 향해
"괜한 일을 시킨 게 아니냐"며 근심으로 배웅하는 누님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아내는 전화기를 꺼내 이곳저곳 전화를 해 댑니다.
"정말 맛있고 좋은 시누이에 감을 싣고 가는데 한 상자 안 사줄래?"
고향마을에 몇 몇 이웃들이 감농사를 짓고 있지만
예전부터 누님네 감이 유별나게 좋다고 소문도 났던지라
품질만큼은 자신할 수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침 집에 도착할 때를 맞춰 인삼을 사러 멀리 금산까지 다녀오시던 光陽님과
며칠 전 동네로 이사를 온 동료한테 각각 한 상자씩 떠 넘기고,
저녁모임을 하느라 친구들이 가까운 식당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간 아내는
한 시간 남짓만에대부분떠넘기고 다섯 상자만 남긴 채 돌아왔습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릴 잘 못하는 나에 비하면
아내는 생면부지의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릴 줄 아는 성격이라서
남편으로써 불만과대인관계에있어 부러움을 함께 사곤 합니다.
시누이의 일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아내가 고맙고 미안스러워
"남은 건 못 팔면 우리가 다 먹지 뭐"하며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지만
내일이면 어렵지 않게 떠넘길 수 있으리라 여겨
걱정같은 건 되지도 않습니다.
누님께선 해마다 몇 천 상자씩 수확을 해서 대부분 공판장으로 출하를 하는 터라
감 20여 상자를 팔아 드렸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홀로 고향을 지키며 고생하시는 누님에게
마음 한 가닥씩 보태드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참 좋습니다.
내 아내에게 감을 사 주신 분들 또한
그런 기분으로 감을 맛있게 드시리라 믿습니다.
2009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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