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풍경이나 예쁜꽃을 봐도왠만해선 겉으로 표현을안 하던 아내가
산마루에 올라서는 순간부터
"멋지다" 또는 "좋다"라는 단어를 서너번씩이나 토해내는걸 보면,
비록 걸어서가 아닌 산비탈 경사진 길을 승용차로 올라오긴 했어도
상큼하고 맑은 새벽공기를 마시며 발아래 펼쳐진 풍경을바라 볼 때의짜릿함을
처음 겪어 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일을 기회삼아정서적인 풍요로움을 좀 더 채워넣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도 등산에 취미를 갖는기회가 되어주길 바래지만
지금까지의 예로 볼 때일상으로 되돌아 가는 순간부터
이곳에서 봤던 그림들과 느낀 감정들이
기억의 저편에서 가물거릴게 틀림없다.
하지만 인생살이에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은 쉬 지워져 버리고
상심하며 고단했던 일들만더 또렸하게 각인되어지곤 하는 게
과거라는 속성이고 보면,
지나간 일들에 집착하지않고 앞만 보며 살아가는게 훨씬더 현명한 일이다.
능선을 타고 넘나들던 구름도 어디론가 다 흩어질 무렵
새벽에 나오느라아침이 부실했던 탓인지뱃속이 허전하다.
때마침한 무리의 사람들이
"점심은 남원추어탕을 먹자"며 우리를 앞질러산을 내려간다.
사람들의 말만으론 남원의어느 추어탕집이 유명한 것인지
아니면 남원추어탕이라는 음식이 특별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평소에조금 번거롭더래도 끼니 만큼은 집에서떼우길 원하지만
오늘같은 날까지끼니 문제로 고민할 일은 아니다.
계곡을 따라 난 산길을 곡예하듯 내려와 제일 먼저 눈에띈 음식점이
용케도 "남원추어탕"이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씌어진 집이다.
그러고 보면 추어탕을 끓이는 방법이 따로 있는 모양이나
막상 식탁에놓여지는 추어탕을 보니집에서 먹던것보다 국물도 찐하지 않고
입안에 와 닿는 느낌도별로 특별한 건 없다.
아마도 배가 많이 고프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음식값을 치루고 나서 밖으로 나오려는데
현관에 벗어놨던 등산화가 보이질 않는다.
점심시간임에도 손님들이그리많지 않았던식당엔
우리보다 먼저식사를 마치고 나간등산복 차림의 부부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유별나게 큰 내 신발을아무런 느낌도 없이 신을만큼
등치가 크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기에 그 사람이 그랬을 거라고는생각되질 않았다.
식당 주인이 신발장에 있던등산화 한 컬레를꺼내며
여기 있지않느냐는 듯 내민다.
다행스럽게도 약간 조이는 불편만 감수하면신을 수는 있을 것 같아
나중 일을 생각해서연락처를 남겨놓고 식당을 나왔다.
잃어버린 건 유명회사의 비싼 신발은 아니었지만
그리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잘 신고 다녔기에입맛이 씁쓸하다.
더구나내 차지가 되었던신발이
가짜만 잘 만들고 품질은 엉망이라고 소문난나라의제품이라서
집에 돌아 온 뒤 사나흘까지도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내 발에 맞다는 사실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해버리면 되는 것을,
내신발보다 새것이라서 좋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을
담아놓으면 힘겨운 이런저런 집착들을 훌훌 털어버리면되는 것을......,
자꾸 되새김질하는나를 보며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깟것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집착을 하냐?"는 아내의 면박을 듣고서야
이상하게도마음이가벼워지는 것 같다.
아내는내가 작은 일에 상심하고 있을 때마다
등을 툭 치듯 흔들어서내 안에 있던 무겁고 심난한 것들을
툭툭 털어내주곤 했었다.
그런 아내가 어젯밤엔 불현듯 "요즘들어 작은 일에도 신경이 쓰이고
아주 작은 언짢은 일에 자꾸 기분이 가라앉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소"라며
툭 하고 던지는말 한마디가 나를 당혹하게 한다.
요즘들어안팍으로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아 평소보다예민해진까닭에
일시적으로 생긴현상인지는 모를 일이나
지금까지 무디게 잘 살아 온사람한테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지라은근히 걱정이 된다.
매사에 예민하여날을 세우는삶이
스스로를얼마만큼힘들고 피곤하게 하는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편한 삶이어야 하거늘......
2009, 8, 12.
'글 - 허공에 쓴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0, 감 장사 (11) | 2009.11.01 |
---|---|
37, 아내의 집 (8) | 2009.08.30 |
23, 소매물도 (6) | 2009.08.09 |
35, 친구들이 모여 놀던 날. (6) | 2009.07.21 |
219, 밥먹고 싶은 날. (12) | 2009.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