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시간 20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친구에게서 전화다.
'왠만하면 내일 오후에 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게 어떠냐?'
폭염이 내리쬐는 한 여름에 지리산 종주를 네번씩이나 함께 다녀왔던 친구이니 만큼
평소에 좋은 일 궂은 일 상관없이 마음편한 녀석이다.
내 상황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먼곳까지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서
모임을 주관하는 이에게 일찌감치 불참 통보를 해 놨었고
녀석에게도 내 처지와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준 적이 있었다.
"얌마, 시방 병원에서 수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달 말일에 하는 줄로만 알고 있던 녀석에게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대충 설명 해 주고선
잘 다녀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지난 5월 수술할 때 설치했던 장치만 제거하면
앞으론 더 이상 수술같은 건 안 받아도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물기는 커녕 오히려 커져만 가는 상처를 보면서
내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옳은 일이 아닌가 싶었으나
기왕에 의사를 믿고 맏기기로 한 이상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나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는지
8월 말쯤 장치만 제거하면 된다고 했던 게 7월 말 수술로 바뀌고,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 조차 문제가 있었는지
이틀 전 진료를 받으러 왔을 때 당장에 수술을 하자는 걸
직장 문제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어서 내가 오히려 이틀이나 늦춘 상황이었다.
의사는 전신마취를 권했으나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 4~5일은 입원해야만 될 일이라서
1시간 쯤의 고통은 감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얼굴에 수술용 덥게가 덥혀지는 순간
세상은 칠흑같이 어두어지고 속은 새까맣게 타는 것만 같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잇몸을 열어서 뼈를 고정해 놓은 장치의 볼트를 풀어내는 것도 알 수가 있었고
여덟개의 볼트 중에 보이지 않는 하나를 찾느라
여기저기 뒤적거리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뼈를 자르고 무언가를 짖이겨 넣는 것도 알 수가 있었고
살을 도려낸 자리를 실로 꿰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마취를 했다지만 견디기 힘든 통증이 밀려왔다.
흔히 들 고통을 견뎌 내는 수단으로"이를 악물면 된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입을 벌리고 있어야만 할 상황이라서
두눈을 질끈 감고 깍지 낀 두손에 힘을 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수술이 끝난 뒤 진통제와 항생제 주사를 놓던 간호사가 빨갛게 충혈된 내 눈을 보며
"그렇게 통증이 심했으면 의사에게 말씀을 하시지 참고 계셨냐?"는 말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내가 눈물바람을 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독한 데가 있다.
둘째 날.
수술을 끝내고 집에 돌아 와
하룻밤을 지새고 아침을 맞았는데도 통증이 가시질 않았으나
지긋지긋한 일을 치뤘다는 사실에 기분만큼은 홀가분했다.
계속되는 통증은 신경을 다른데로 쓰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식은 죽 한 그릇을 물 마시듯 하고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반창고를 붙혀놓은 얼굴을 남에게 보이기가 싫어서 마스크를 쓰고 걸으니
사람들마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지나간다.
어쩌면 요즘 유행하는 신종 바이러스 환자로 오해받는 느낌이 들고,
장마철의 무더운 날씨탓에 금새 땀으로 후즐근히 젖은 터라
곧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땀을 흘린 뒤라서 그랬을까?
샤워를 하고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고 통증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잠 자리에 막 누워 있으려니
모임에 온 친구한테서 내 소식을 들었노라며
몇년 전 아내랑 셋이서 홍도 여행을 갔던 여자친구한테서 전화다.
입언저리를 반창고로 붙여놓은 까닭에
어눌하게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내 말소릴 듣고선
"말을 많이하면 안 되겠네"하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사실, 끼니때 마다 죽 한 그릇씩은 어쩔 수 없이 먹고 있지만
말을 하거나 입놀림을 할 때마다 자꾸만 피가 나기 때문에
아내에게도 말 대신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던 터라
서둘러 전화를 끊어 준 친구가 고맙기 그지없다.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나 싶었는데
요란스레 울리는 전화기 신호에 잠을 깨고 말았다.
밤 열 한시 사십분,
발신자를 보니 모임에 참석했을 또 다른 여자친구다.
(난 왜 이렇게 여자복이 많은지.....쩝~!!!)
"내일 아침에 친구들과 덕유산을 케이블카로 오르고
걸어서 하산을 하려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
남편이 잠에 들기까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한 채 조심스럽던 아내가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하려 하지도 않고서 짜증을 낸다.
아무말 말라며 검지손가락을 치겨세워 입을 가리며
"리조트 쪽으로 가서 어쩌고 저쩌고.........."
내가 아는대로 한참동안 설명을 해 주고나서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입안에선 다시 짭쪼롬한 액체가 고이기 시작한다.
"피가 나더래도 뱉지 않고 삼켜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를 상기하며
아내의 짜증섞인 투정을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해 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정신만 초롱해 진다.
그런데 이 가시네는 얼마나 재미있길레 한 밤중에 전화를 해 놓고서
수술은 잘 받았는지, 또 상태는 괜찮은 건지,
아니면 치료를 잘 하라든가 하는 말도 안 하냐?
어둠을 뚫고 멀리서 번개와 천둥치는 소리가 그칠 줄 모른다.
이제 지긋지긋한 장마도 제발 그만 걷어 가면 좋겠다.
벌써 이틀 전의 일이다.
2009,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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