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몸을 담은 이래 9일이나 되는 긴 휴가는 처음있는 일이나
그 날들을 어떻게 다 보낼까하는 행복한 고민같은 건 할 상황이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휴가랍시고 나들이를 하게 된다면
세 끼니 때마다 먹을 약과 식염수까지 챙겨야 하는 건 그리 번거로울 일이 아니나
상처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따를려면
집안에 머무는 게 최상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뒹굴기가 재미없으면 거실로 나와 TV를 보거나
아니면 춘란의 새촉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피며 베란다에서 시간을 보내니
첫날 하루를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둘째날 오후쯤엔 남아있는 7일동안이 지루하게 여겨지고
아내의 눈치가 살펴지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편치가 않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몸이 불편한 건 용캐도 참아내곤 했었지만
마음이 불편할 땐 견뎌내기 힘들어서 심난해 했던지라
저녁 상을 두고 마주앉은 아내에게 "내일 이른 새벽에 떠날테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기왕 가는 길이니 마음편한 이들도 함께 가면 좋겠다는 게 아내의 뜻이라서
부인이 친구들과 지리산으로 떠나 홀로 남겨진 친구녀석과
가까이에 살면서 하차잖은 먹거리도 나눠먹을 줄 아는 동료 부부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소매물도를 가려고 집을 나선 지 이번이 세번째다.
작년 이른 봄날 산악회를 따라 거제도 저구항까지 왔다가
풍랑주의보가 내려 망산 산행을 대신하고 돌아와야 했었고,
작년 여름엔 식솔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가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꼬라지 자랑만 하다 되돌아 왔었으니,
이 상황에서 여행을 어디로 가면 좋을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새벽 3시 반에 일행들을 만나 고속도로를 두어시간 남짓 쉼없이 달려서
통영의 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하니 여섯시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
일곱시에 떠나는 첫배는 벌써 매진이란다.
(남망산 공원)
별 수 없이 두시간 뒤에 출발하는 배표를 구해놓고
여객선 터미널 지척에 있는 남망산 공원엘 가니
통영항과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아침운동이나 산책나온 사람들이 눈인사를 나누며 지나가곤 한다.
그때 문득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어
산책을 나온 이에게 "이곳 어디쯤에 벽화가 있다던데요?"하고 물으니
바로 엎드리면 코닿을만한 언덕베기를 가르키며 "동피랑"이라 일러 주면서
가는 길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동피랑이란 "동쪽끝 벼랑"이라는 통영의 사투리라고 한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50여 가구가 모여사는 그곳 달동네는
일제 강점기 통영항과 중앙시장에서 잡부로 막일을 하던 외지 이주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가파른 언덕길과 사람과 사람끼리 겨우 비켜갈 수 있는 좁다란 골목,
시멘트 블록으로 담을 쌓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은 허름한 집들......
이 마을은 과거 조선 수군의 시설물이었던 북대루의 복원을 위해 통영시에서 철거하려 했으나
작은 보상금으로선 아무데도 오갈 수 없던 주민들의 형편을 고려해 보존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마을의 도로벽과 골목 사이의 집벽에 그림을 그리는 공모전을 열게 되었고
그 이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임없는 마을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해질녘이면 하루의 품을 팔아 번 돈으로
쌀 한됫박 고등어 한 손 사서 오르는 언덕길이 고단한 삶만큼이나 힘겨웠을 달동네,
뱃시간도 넉넉하게 남아 벽에 그려진 그림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골목을 걸었다.
그러나 울타리나 대문도 없는 오두막의 좁고 누추한 방에
병들어 누운 백발의 할머니와 그 옆을 지키고 앉아있는 초라한 노인네를 보는 순간
그런 힘겨운 삶이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구경꾼으로 와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미안해서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비록 초라했던 달동네가 벽화로 덧칠되어 구경거리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삶까지도 기웃거려선 안 된다는 나름대로의 생각때문이었다.
아무리 휴가철이고 주말이라지만
여객선 터미널 부근엔 각지에서 몰려든 승용차로
거리마다 온통 주차장으로 변해 아수라장이다.
수많은 여행객들로 부터 걷어들인 수입의 일부분이라도
동피랑 달동네의 고단한 노인네에게 건네진다면
그런 초라한 모습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아까 봤던 영상이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는다.
내가 그동안 소매물도를 마음에 담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여행이나 구경 보다는 풍경사진 한 장 건져오고 싶어서 였던 게 솔직한 속마음이다.
그러나 집을 나설 때부터 줄곧 먹구름만 가득한 날이라
그런 바램을 접으니오히려 홀가분해진다.
정원을 다 채운 아담한 여객선 안엔 1층과 2층으로 구분되어 있고
층마다 칸막이로 나눠진 방마다 승객들이 편하게 눕거나 일행들과 재잘거리는 광경은
크고 작은 섬을 오가는 동안 배 안에서 자주 봐온 터라 눈에 익숙하다.
승객들 중엔 7~8명쯤 되는 젊은 일행들이
서로 사진을 찍어 주거나 재미있는 화잿거리로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 중에 하얀 옷과 채양이 넓은 하얀 모자를 쓴 한 아가씨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비슷한 차림의 아가씨가 소매물도 등대섬을 배경으로 담은 사진을
몇 번 봤었기 때문이다.
통영항을 출발한 지 1시간 20분만에 목적지에 도착하니
우중충했던 하늘이 말끔하게 걷히고 아담한 섬이 손님을 반겨맞는다.
선착장에서 망태봉 정상까지 경사진 700여m를 오르는 동안
햇살은 따가우나 시원한 바닷바람 탓에 흐르는 땀이 금새 마르고 만다.
망태봉 정상에서 바라 보이는 등대섬은
옥빛과 쪽빛으로 짙게 물든 바닷물에 느긋하게 몸을 담근 채
쉼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만들어 낸 하얀 물보라와 어우러져
사진에서 봤던 만큼이나 아름답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일행들의 사진을 한장씩 담은 다음
뒤따라 갈테니 등대섬으로 먼저 내려가라 하고 그곳에 혼자 남았다.
일행들이 등대섬으로 내려간 지 10여분이 지날 무렵
배 안에서 봤던 젊은이들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저마다 기념사진을 한장씩 찍어댄다.
평소에도 왠만해선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일이 익숙치 않았지만
배 안에서 봤던 아가씨 차례가 지나가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카메라를 든 청년에게 넌즈시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내가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뒤에 남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아무런 대꾸도 해주질 않았다.
찍지 말라는 뜻을 침묵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걸 직감하며 돌아서려는데
그 아가씨는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셔터를 다 누를 때까지 기다려 주고 있었다.
비록 재미삼아 찍어대는 사진이지만
생김새는 그만 두고라도 배경과 잘 어울리는 차림새라야
사진으로써 보기가 더 좋더라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때문에
그 아가씨에게 더 집착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출발할 때소요시간을 감안해서 왕복 배표를 구했던지라
소매물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세시간에 불과한데도
망태봉에서 사진을 찍느라 거의 반을 소비하고 말았다.
언제 다시 이 섬에 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일행들 뒤를 쫓아 등대섬으로 건너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훑어보고선 다시 망태봉으로 되돌아 오르니
코는 벌렁거리고 심장은 요동을 치며 온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다행히 배가 출발할려면 약간의 여유시간이 있어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의 동백나무 그늘에서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니
집을 나선 이후 처음으로 내가 여행을 왔다는 사실을 실감 할 수 있었다.
하늘은 멀쩡한데도 풍랑주의보가 내리면 올 수 없는 섬,
언제든 마음먹고 단숨에 달려 올 수도 없는 섬,
못 가 본 곳이 하도 많아서 생전엔 다시 못 올 것만 같은 섬,
옥빛과 쪽빛과 초록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에서
아주 잠시 머물다 떠나려는 마음이
어려운 숙제 하나를 풀어 낸 순간 만큼이나 홀가분하다.
2009,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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