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섣달 그믐날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9. 1. 26. 04:55

내 어릴적엔
일년 중에 섣달 그믐날 밤보다 더 긴 날은 없었습니다.

설날 아침이 밝아 오면
장농속에 넣어둔옷을 꺼내 입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께 새배하고 나서 새뱃돈 받을 생각에,
차랫상에 올려진 맛난 음식들과 떡국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새벽 첫닭이 울기만을 기다리며 뒤척이는 밤이라서
더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먹을 거리가 귀할 때였지만
이날만큼은 집집마다 절구에 떡메치는 소리와
생선과 고기굽는 냄새가 쉼없이 담장을 넘나들고,
머슴살이 하던 사람들은
새경을 받아 사랑하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 가는 기쁨 보다는
그동안 정들었던 주인과 이별이 아쉬워
옷소매로 눈물 훔치며 대문을 나서던 날도 섣달 그믐날이었습니다.

지게에서 컴퓨터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동안
담장 너머로 떡 접시를 주고 받던 이웃들은 물론
밥상머리에서 젓가락질 다툼하던형제들도,
생각날 때마다 애틋한 그리움에 가슴이 아픈 아버지 어머니도
내 어릴적 섣달 그믐날의 해묵은 기억속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내 부모님과 형제들의 보금자리였던 집터를

남의 손에 넘겨 준 이후부터으레 그랬었고,

이번 설을 며칠 앞두고 부모님 산소에 미리 성묘를 갔을 때도

옛 고향마을에 눈길 한번 주지않고스치듯 지나쳐 버리는 내 심사를

내 자신 말고는 누구도 헤아려 주진 못할 일입니다.

경기가 어렵기 때문이라지만

실로 모초롬만에 명절을 전후해서출근을 하지않고 며칠동안쉴 수가 있게 되어서

그 날들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까 궁리하던 차에

오가는 일이 만만찮아 이번 설은 서울에서 쇠는 게 어떻겠냐는아이들의 청이

내심 반갑습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서울로 오는 날

눈보라가 몰아치고 도로는 얼어 붙은데다

수많은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귀향길을 보면서
아이들을 고생 시키지 않고올라오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명절만 돌아오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럽기만 합니다.
기다려 주는 이가 있어서 부럽고,
보고싶은 이가 있어서 부럽고,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고향집의 뜨끈하게 덥혀진 온돌의 온기로
샅샅이 녹여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향을 마음속에 묻어 둔 이로선 마냥 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첫닭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새벽입니다.
낯선 서울의 한 복판에서 그럴 일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옛 생각에 흠뻑 젖어봅니다.

첫닭 울음소리에 맞춰 어머니께서 부엌으로나가 떡국을 끓이시는 동안

아버지께선 소죽솥에 불을 지펴놓고

밤새 쌓인 눈을 눈가래로 밀어내다가

시린 손을 호호 불어대시던 모습이아른거리더니

이내코끝이 시큰거리고 마는 섣달 그믐날 밤은

내 어릴적의 긴나긴 그날 밤처럼 더디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동짓날 밤보다이 밤이더 길게 느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나,

아내와아이들이 내 곁에 있음에도

마음은 왜 이렇게 허전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2009,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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