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국화를 보며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8. 11. 8. 02:46

지난 해 늦은 가을 어느날,
한 아파트 경비실 옆을 지나오다 탐스럽게 피어난 국화(大菊)를 보는순간
욕심이 생겨곁가지 하나를 떼어 와 베란다에 심어놓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뿌리가 충실하지 못해서 살아날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겨울을 무사히 넘기고봄이되자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해
가을이 되자 내 키와 견줄만큼 자라난 줄기의 끄트머리에서꽃망울이 생겨나고
며칠 전엔드디어 작년에 봤던 그 꽃만큼이나 탐스러운 꽃이 피어났습니다.

십 수년 전부터춘란과 분재를 재미삼아 기르고는 있으나
국화를 길러보긴 처음인지라
가을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던 어느날
줄기의 끄트머리에 맺혀 있는 조그마한 꽃망울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꽃망울이 차츰 몸집을 불리다
노란 꽃잎을 톡톡 터뜨리며 화사하게 피어나니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꽃봉우리에 코끝을 들이댈 때
와닿은 향기가 그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도 잠시일 뿐
피어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꽃송이 가장자리부터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몇 번을 망설이다 말고서 아쉬운 마음을 도려내듯
모가지를 삭둑 잘라버리고 말았습니다.

花無十日紅이라지만
그동안 보살피며 지켜봤던 날들에 비해
너무 빨리 시들어 버리고 말아서
잘려나간 모가지를 보며
서운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생김새와 향기로 보면 단연 으뜸이라 해도 괜찮을 꽃임에도
집에 두고 기르는데 마음을 두지 않았던 건
죽어가는 뒷모습이 썩 개운치않다는 이유때문이었지만
이처럼 내 손으로 보내고 나니

간밤에훌쩍 떠나버리곤 해서 서운하기 그지없었던 동백이나 진달래보다

오히려 더 낫다는 생각도 듭니다.

며칠 전에 친구와 둘이서 변산 솔섬 출사를 가는 길에
고창읍 쪽 방장산 자락에 조성되어 있는
30만평의 드넓은 국화밭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곳에선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극심한 가뭄에 시달려 제대로 자라지 못한 탓에
드넓은 자리에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국화의 모양새가
왠지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어
"하루에 1500톤의 물을 뿌려서 길러냈다"는 문구의 현수막을
걸어놓지 말았으면 차라리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을바람에 물씬 베어있는꽃향기에 한껏 취해봄직도 하련만
이 꽃을시로 읊조렸던어느 시인과 관련된 행사를 알리는 또 다른 현수막을 보는 순간
갑자기 씁쓸해져버린 마음을 다독거리지 못한 채
그 넓은 국화밭을 차로 한바퀴 쓱 돌고선 미련없이 떠나오고 말았습니다.

꽃과 향기가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족할 일을 두고
가는 뒷모습까지 미리 상상하면서 탐탁잖게 여기거나,
멋진 시어 속에서 흠뻑 젖어 봄직도 하련만
변절과 아첨으로 얼룩진 시인의 삶과 연계시키며 식상해 하곤 하는버릇이
참으로 못마땅할 때가 많습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을
이리저리 얽어메서 더 복잡하게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좋잖은 버릇을 털어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지난 날들을 뒤돌아 봐도
마음 편할 때보다 더 좋은 때가 없었건만.......

2008,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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