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다운 눈으론 첫눈인데
사흘동안 쉼없이 쏟아 붓는 첫눈은 또 처음입니다.
첫날은 바람도 거세게 불어서 온 세상이 혼란스러웠으나
이틀째부터 함박눈으로 바뀌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환상적입니다.
그동안 벼르고 별려왔던 무등산 눈꽃 출사,
이런 날에 휴일이 끼어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라기 보다는 대단한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산행을 할 때 평소 가지고 다니지 않던 스틱도 챙기고
오랜만에 아이젠과 보온장갑은 물론 여벌의 면장갑에
지난 늦가을에 사 뒀던 오리털 파카까지 베낭에 넣으니
마음부터 든든해지는 아침입니다.
눈길이라서 평소 걸리는 시간보다 30분 일찍 버스 승강장에 나왔더니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손님들을 가득 싣고서 떠나버려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는 겪인냥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보고 있을 때
앞서 간 버스가 떠난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또 한 대의 텅 빈 버스가 오다니
세상에 이런 경우도 흔치않은 일입니다.
눈길이라서 친구와 약속했던 시간보다 15분이나 더 걸려서
증심사 종점에 도착했기에
추운 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내리려는 순간
내가 탄 버스의 앞에 세워져 있는 버스에서 그 친구가 내립니다.
하늘이 열리길 기대하고 염원하며 산길을 오르나
하늘은 구멍이 뚫린 양 쉼없이 쏟아져 내립니다.
높이 올라 갈수록 눈이 많이 쌓여 있어
2만원을 주고 산 스페츠(등산화에 눈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발토시) 덕분에
발이 젖을 염려가 없으니 돈을 쓰고도 오랜만에 아깝지가 않습니다.
중머리재로 오르는 사이에 나뭇가지에 핀 눈꽃이 환상적이라
사진 몇 장 찍어 볼 심사로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었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함박눈이었으나 오르면 오를 수록 바람이 거세고
휘몰아 치는 눈보라가 사람의 눈을 뜰 수 없게 만듭니다.
장불재를 오르기 직전 2백여 m는 돌계단 길이나
눈이 하도많이 쌓여서 경사진 평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장불재가 눈앞인 곳을 헐떡이며 오르는데
갑자기 시커먼그림자 하나가 우뚝 서더니
"장불재에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다"며 물어보지도 않는 말을 일러줍니다.
그 순간 발 앞에 유난히 우뚝 솟아 있는 돌을 딛으려다
미끄러져 내 몸이 앞으로 꼬구라지면서
목에 걸었던 카메라가 돌에 부딪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맙니다.
그 순간 "내 카메라!!!" 하면서 눈을 털어내 이곳저곳 살피니
아! 정말 다행스럽게도 후드(랜즈 보호용 캡)만 깨지고 랜즈는 멀쩡합니다.
만약 렌즈가 깨졌더라면
등산이건 사진이건 다 망치고서 기분이 엉망이 되었을텐데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 때 후드를 끼울까 말까 망설이다 끼웠던 게
그처럼 다행스러울 일이 없습니다.
장불재에 부는 광풍은 몸을 가눌 수조차 없고
짙은 먹구름속에 쏟아지는 눈보라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만듭니다.
서석대는 포기를 하고 하산을 하려는데
함께 간 친구가 서석대 쪽으로 향해 앞장을 섭니다.
입석대와 서석대,
평소에 내가 그리던 그림은 그려져 있으나
짙은 먹구름과 눈보라에 휩싸인 채 도무지 모습을 드러내주지 않습니다.
사람이아닌 하늘이 하는 일이라서
이럴 땐 다음을 기약하고 내려오는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서석대를 내려와 중봉으로 향하는 억새밭 오솔길에서
홀로 산에 왔다 내려가는한 아짐을 만났습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아짐한테서
어제도 산에 오늘도 산에, 그리고 내일도 산에 올 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등산다람쥐"로 별명을 붙여드렸더니 기분이 나쁘진 않은가 봅니다.
중봉에서 중머리재로 내려오는 길은
무등산 등산로 중에 가장 가파른 길의 하나입니다.
아이젠을 찼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내려가던 아짐이
자꾸만 미끄러져 딩굴고 넘어지는 통에
팔을 붙잡아주거나 보듬어 일이켜 세우기를 여러번,
이 광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땐
틀림없이 사이좋은 부부로 착각할만 합니다.
넓지막한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채
사흘동안 내린 눈을 이고 홀로 서 있는 소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자
불현듯멋진 그림 한장이 생각납니다.
함께 간 친구와 아짐을 나란히 앉게 하고선
'몸을 기대라, 손을 얹어라'는주문에
엉덩이가 차갑다는 한 마디 투정만 해댈 뿐
낯선 사람인데도 시키는대로 해주는 아짐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약사사 삼거리 갈림길에서
아짐은 세인봉으로 우리는 약사사 쪽으로 들어서며 서로 헤어졌지만
마스크를 한번도 벗지 않은 아짐의 얼굴을 못 봤다고 해서
서운하다는 생각 보다는,
만나서 반갑고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겁고 고마웠으며
하산을 할 때까지 무사고를 비는 마음이면 족할 일이었습니다.
세상사가 이날처럼 걱정할 일보다 좋은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눈 구경 실컷하고 즐겁게 보낸 탓에
그 동안 쌓여있던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린 것만 같아서
이처럼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날이면 자리에 눕는 순간 깊은 잠에빠지게 되고
꾸는 꿈 또한 길몽일 수밖에 없으니
깨어날 때 기분은 어느 때보다 더 여유롭습니다.
새해 첫날기분좋은 아침을축복이라도 하려는 듯
함박눈이 소복히 내려서 온 세상이 은세계입니다.
올 한해는 걱정스러운 일 보다는 좋은 일이,
그리고 건강과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2008년 1월 1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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