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호연지기 ( 浩然之氣 )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10:44


( 2005년 4월 08일 금요일 )

안개가 자욱한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섰기에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산길입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걷는 산길이라서
계절이 오갈 때 바뀌는 풍경 말고는
돌멩이 하나에서 땅 위로 불거진 솔뿌리까지
모두가 낮익은 것들입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있던 곳엔
어느새 제비꽃, 현호색, 산자고, 양지꽃 등의 봄 들꽃들이 피어나
안개비에 촉촉히 젖은 채 저마다 자태를 뽐내며
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나뭇가지에서 막 돋아난 연두빛 어린잎마다
안개가 맺어놓은 물방울들이 각기 제 몸집을 불리고 있다가
끝내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톡톡 떨어지며
숲속의 정적을 깨뜨립니다.

문득 어디선가 불어온 한 올의 실바람에
가느다란 꽃향기가 있어 킁킁거리며 두리번거리지만
어떤 꽃에서 내뿜은 향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인적이 없는 약수터에서
물 한모금 마시고 으스러져라 기지개도 크게 켜 봅니다.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어 느긋하게 걷는다곤 하나
숨이 가프고 땀이 나는 건 여느때와 마찬가지입니다.

반시간쯤을 헐떡거리며 산 능선에 올라서니
아침햇살에 눈부신 안개바다가 끝도없이 펼쳐져 있고
영암의 월출산, 화순의 모후산, 담양의 병풍산과 추월산, 곡성의 동악산 봉우리들이
머리만 빼꼼히 내밀었다 다시 감추곤 하며 서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땐 나 또한 신선이 되어
산봉우리들을 징검다리 삼아
멀리 지리산 천왕봉까지 단숨에 건너 뛰어다니거나
안개바다를 마음대로 헤엄쳐 다니는
조금은 유치한 상상을 하고있는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만
구름위에 하늘아래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
이 순간이야 말로 하늘과 구름과 산과 내가 하나일 뿐입니다.

이런 날 만큼은,
아니, 산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내 옹졸한 새가슴도
하늘만큼이나 너그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날이면
궂이 혼자서 산엘 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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