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비 개인 무등산에서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6:54
( 2002년 05월 05일 일요일 )

밤에 뿌린 비에 질퍽거리는 산 길을 걷다가 보니 평소보다 훨씬 힘이 들고
짙은 안개에 휩싸인 산 속엔 산새소리만 들릴 뿐 바람 한올 불어주지 않아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심장은 터질 듯 헐떡입니다.

평소 두시간 반쯤이면 넉넉히 오르던 정상을
세시간 가까이 걸려서 힘겹게 오르고 보니
구름위에 덩그러니 솟아있는 산 봉우리 말고는
아랫쪽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혼자라는 생각에 두렵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숲속에서 일렁이던 바람이 천천히 안개를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안개에 묻혔던 봉우리들이 하나 둘씩 제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간밤의 비에 견뎌냈던 철쭉들이 이슬을 흠뻑 머금은채
부끄러운 듯 이곳 저곳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습니다.

자연이 연출하는 풍경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하며
운무가 연출하는 풍광에 넋이 나간 듯 취해있다가
이런 풍경을 혼자 본다는 것이 아쉬워
전화기를 꺼내 집에 있는 아내에게 짧은 문자를 보냅니다.
"이런 풍경을 혼자만 보고 있다니....신선들이 오래 사는 이유를 알겠어!"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서 시계를 보니 벌써 한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가져온 것이라곤 참외 한조각, 작은 도마토 하나,
그리고 딱 한잔의 커피가 전부지만
내게는 아주 훌륭한 성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산하는 길에서 이름모를 꽃향기 풍기는 곳에 발길을 멈춥니다.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들꽃에서 뿜어내는 가냘픈 향기는
이 세상의 어떤 향기보다 더 곱고 아름답습니다.
지쳐있는 다리가 들꽃의 향기에 새 힘을 얻고
빈 뱃속에 채워넣어 배고픔도 잠시 잊고 내려옵니다.

최소한 새로 시작될 한 주 만큼은
조금 뻐근한 다리의 느낌과 산 봉우리에서 봤던 아름다운 풍경과
들꽃의 아름다운 향기를 느끼며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쉬는 날이면 산으로 가는 첫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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