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버지의 존재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8. 11:56

(2002-02-02 )

야근 중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고 전화입니다.
난방이 하룻밤 쯤 안되는 일이야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엄동설한 긴긴밤을 덜덜떨며 웅크리고 잠을 자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함은 당연함입니다.

아들녀석한테 어떻게 보일러가 가동이 안되냐고 물었더니만
방안에 있는 조절기에 아무런 표시가 되지않아서
스위치를 눌러도 보일러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문제가 될 수 있는 몇 가지의 원인이 짐작가는 게 있었으나
나는 그 순간 전혀 엉뚱한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인데,
아버지의 실력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하룻밤정도 모자지간의 정을 느끼며 꼭꼭 보듬고 밤을 새라고 할것인지
아니면 한두시간 후에 전화로 가르쳐 줄 것인지
심술궂은 생각을 하며 웃습니다

그런 생각은 잠시일 뿐 녀석에게
보일러의 전원이 제대로 꼽혀져 있는지 확인해보고
전원플러그를 뺏다가 다시 꼽아보라 했더니만
시키는대로 하니 보일러가 정상으로 작동이 된다며
아버지의 실력을 인정하겠다는 듯 웃습니다.

설령 그것이 원인이 아니고
기계적인 고장이 생겨있어서
내가 직접 고치지 못할 경우일지라도
비록 수리비용은 부담해야 할 일이지만
수리업체에 맏기면 해결되는 일이라서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작동되지 않으면
전원에 이상이 없는지 여부만 확인하면 되는 상식적인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아버지에게 물어보려는 습성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니나
반면에 무슨 일이든 아버지는 할 수 있다는 의식이 가족들에게 베어있어서
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리 싫은 일은 아닙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내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신 분이셨듯이
녀석들에게 있어 아직까지는 내 존재도 그러리라 믿고 있습니다.
비록 세월이 더 흐르면 나의 위상이 차츰 재조명되겠지만
녀석들이 성장하여 자립을 하기 이전까지는
정신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라면
나의 역할은 그것으로써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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