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1~2학년 시절 큰 병앓이 이후
십수 년 전쯤에 폐렴으로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했던 일과
7~8년 전 해묵은 축농증 수술과
3년 전 쯤 목욕탕에서 넘어져 세끼손가락 인대가 끊겨 사흘동안 입원했던 일 말고는
건강에 관해선 비록 안심은 하지 않았어도 크게 걱정은 하지않고 살았었다.
국민학교 시절 병원에 다닐 무렵 하도 심난했던 그 어린 나이에
기왕 세상에 태어났으니 아버지 나이인 마흔 다섯살 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며,
그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며 빈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건강에 자신이 생겨났던 때인 결혼을 한 이후부턴
마흔 다섯이라는 나이를 의식하거나 집착을 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
어렸을 적에 바램을 했던 나이를 지나 올 무렵엔
그런 생각을 언제 했었는지 조차 까마득히 잊은 채 몇 해를 지나온 다음에야
내가 어릴적에 그런 바램도 했었다는 기억을 어슴프레 떠올리게 되었다.
가정을 일구는 동안
아내와 생각의 차이로 생겨난 갈등에 극한 상황까지 갈 때도 있었고
때론 감정을 얹혀서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나날들은 남편을 남편으로 섬길 줄 아는 아내와
착하고 성실하게 자라주는 아이들이 있어 내겐 더 없는 행복이었다.
6촌 형제간이자 어릴적 절친했던 친구가
걸음마를 막 시작하려는 딸 아이를 두고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도,
아내와 나를 엮어줬던 친구가
어린 세 아이들을 두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도,
지난 봄에친구녀석이 폐암으로세상을 떠났을 때도
죽음엔 순서가 없다며 내 책임을 다하는 날 까지는
아프지도 죽지도 말아야 한다는 마음속 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 자식이 험난한 세상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된 다음이라면 모를 일이나
그 전에 떠나는 것은 책임을 다 하지 못함이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랫쪽 턱뼈의 대부분을 잘라내고
다리뼈나 엉덩이 뼈를 잘라다 붙여야 하며
없어진 이는 인공으로 만들어서 박아야 한다는 상황을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다.
운이 좋게 잠이 들었을 땐 잠시나마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눈만 뜨면 내게 닥쳐 온 상황에 낙담해 하며 한숨만 짖다 보니
아내에게도 미안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유시간을 갖지 않으려고 틈이 날 때마다밭으로 가서
지난번에 비닐을 씌워놓은 이랑에 씨를 뿌리며 한나절을 보내고
점심무렵 피곤한 상태로 돌아와서 잠에 떨어지곤 하다 보니
차라리 집에서 심난해 하는 것보다 낫다.
조직검사를 하기 위해서 떼어낸 자리엔
큼지막한 알사탕을 넣어놓은 것 처럼 부어오른 채
닷새가 다 되어서야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나
꼬멘 자리에선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는 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회사 근무를 하면서도 인터넷을 통해서
"턱뼈 속에 양성종양"이라 써 넣고 검색을 해 보니
내게 해당되는 부분이 이렇게 나와있다.
"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완전히 뼈안에 묻혀 있는 경우에
치아를 둘러싸고 있는 치아 주머니(치배)안으로 물이 차서 물혹(낭종)이 되거나
세포가 변성되어 양성 종양이 생겨 점점 턱뼈를 흡수하면서 성장한다.
이 경우 특별한 증상이 없기 때문에 환자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턱뼈의 상당 부분이 흡수된 다음에야 발견되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고
심한 경우 턱뼈를 절단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까지 된 책임의 전부가 나에게 있지만
2년 전 건강검진을 했던 치과담당 풋내나던 여의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형식적인 건강검진이라지만
조금만 더 신중하게 봐 주고
최소한 "병원에 가서 사진 한장 찍어보라"는 말만 해 줬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텐데........
'글 - 허공에 쓴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임실의 오봉산에 갔던 날 (0) | 2007.05.20 |
---|---|
7, 내게 왜 이런 일이(3) (0) | 2007.05.17 |
5, 내게 왜 이런 일이(1) (0) | 2007.05.15 |
12, 철쭉산행과 보성여행 (0) | 2007.04.29 |
11, 紅島야 우지마라 (7, 紅島야 잘 있거라 ) (0) | 2007.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