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철쭉산행과 보성여행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4. 29. 15:45

( 2005년 5월 06일 금요일 )

짙은 먹구름과 마파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마음이 바쁜 아침,
점심 대용으로 김밥을 사 오겠다는 사람은
출발예정시간을 30분이나 넘기고서야 허겁지겁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내심 은근히 짜증도 나지만 겉으로 드러내서 언짢게 할 일은 아니다.

남녘의 산하에 철쭉이 피었다길레
일찌감치 친구 일행과 꽃구경을 겸한 산행을 계획했었으나
연일 화창하던 날이 공교롭게도 오늘같은 날엔 잔뜩 흐려지고
산 밑에 도착하기도 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연이란 게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라 그리 흔할 일은 아닌데도
실제론 자주 생겨나곤 해서
그럴 때마다 이상한 일이라 여기곤 한다.

어린시절의 경험 중에
맑은 날만 계속되다가도 소풍을 가거나 운동회를 하는 날이면 비가 오곤 해서
적잖이 실망을 하곤 했던 일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일이 되풀이되곤 하니
하루쯤 편하게 즐기겠다는 인간의 심사에
하늘이 시샘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장흥에서 이름난 산 중엔
가을 억새의 천관산과 봄의 철쭉으로 유명한 제암산이 있어
사람들은 이른 산행을 마치고서 강진의 마량항이나 보성의 율포 바닷가로 가서
싱싱한 회에 술 한잔씩 하고서 되돌아오곤 한다.



( 장흥의 제암산 정상 )

그러나 장흥쪽으로 철쭉산행을 하다 보면
철쭉군락지는 제암산에서 능선으로 각각 연결되어 있는 사자산(666m)과
군의 경계를 넘어 보성의 일림산에 있음에도
왜 '제암산의 철쭉'으로 알려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 사자산 정상에서 바라본 제암산 정상 ------> 멀리 능선의 제일 높은 암봉이 제암산 정상이다 )

제암산 휴양림에 주차를 해 놓고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산행을 시작하여
제암산과 사자산의 갈림길에 이르니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고 구름마져 짙게 드리워져서 시야마져 흐릿하다.



( 사자산의 철쭉 ------>건너편으로 보이는능선이 제암산이다.)

그러나 화려하게 피어난 철쭉의 군상들이
구름속에서 빼꼼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아!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산이나 들에 피어난 꽃들 중에
철쭉이나 진달래만큼 화려하거나
늘 봐도 싫증나지 않은 꽃이 또 있을까 싶은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런지도 모르겠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때문에
능선에 펼쳐진 철쭉화원은 볼 수 없어 아쉬우나
따가운 햇살에 지친 모습 보다는
비에 촉촉히 젖은 채 활짝 피어있는 자태가
오히려 생동감이 있어서 좋다.



( 사자산의 철쭉 )

비옷을 챙겨갔기에 산행하는데 그리 큰 문제는 없었지만
길이 질퍽거릴 뿐만 아니라 비좁은 산길이 상춘객들로 붐비고,
지금 눈에 보이는 철쭉만으로도 아름답기 그지없어서
철쭉을 보기위해 정상까지 기를 쓰고 올라가는 것은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아
중간쯤에서 잠시 머물다 솔숲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떼우고 하산을 하려는데
내리막 길이 미끄러워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우성들이다.



( 보성 일림산의 철쭉 )

요즈음엔 집 주위나 길 거리에 개량종 철쭉이 형형색색으로 피어나는데도
비가 오는 날임에도 이 처럼 많은 사람들이 산에 핀 철쭉을 보겠다며 몰려드니
인위적인 것 보다는 자연 그대로를 더 좋아하는 건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인가 보다.

비를 촉촉히 맞으며 제암산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오니
아직도 시간은 한나절이나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두고 지나가지 않듯이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보성 대한다원의 차밭 풍경 )

일행과 함께 율포쪽으로 한참을 가다가
연두빛 새싹이 한참 돋아나는 차밭에 잠시 들렀다.
오가는 길에 편한 마음으로 차 한잔 사 마시고 지나다녔던 차밭도
수년 전 이곳 향나무 숲길이 어떤 회사 광고의 배경이 된 뒤로부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여 년중 어느때건 끊임없이 사람들로 몰려들면서
이제 얼마후 주차장이 단장되면 입장료를 내고 들락거려야 한다니
인심이 각박해지는 건 시대의 흐름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전국의 유명산을 국립공원이라 지정해 놓고
그 안에 있는 사찰의 사유물을 문화재니 국보니 하며 지정해 주고
사찰이 어디인지 조차 모르고 지나치는 산행객들에게
입장료와 사찰관람료 또는 문화재관람료에 적지않은 주차료까지 받아 챙기는데 비하면
이런 경우는 그래도 시원한 구경거리라도 재공해 주니
훨씬 더 양심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 보성 봇재 차밭 전경 )

차밭을 나와 봇재에 이르니
시야는 흐리지만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 율포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해수욕장 소나무숲을 거닐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횟집에 들어가니
휴일임에도 비가 와서 그러는지 손님들이 그리 많지않아서
모초롬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농어회와 광어회를 네 사람이 넉넉하게 먹을만큼 시켜
술을 곁들이니 뱃속이 점차 따뜻해지고
마음의 긴장도 풀려서 그러는지 빈 술병이 탁자에 줄을 서고 있다.



( 맑은 날의 사자산의 철쭉)

세사람이 술에 취해 제 발로 걷든 말든
운전을 해야 할 한 녀석은 딱 한잔만 마셔야 한다는,
그리고 어떻게든 차에 태워 집에까지 데리고 와야만 한다는 것 말고는
횟집에 들어가기 전에 각 한병씩만 마시자 했던 약속은
한갖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걸 모를리 없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행여 남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하고 어제 기억을 더듬거릴 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만 마셔야 한다는 것은
내 스스로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무겁고 속이 쓰린데
아내는 아직도 꿈속이다.
이런 날 술국이라도 한그릇 끓여주면 오죽 좋으련만....

어제 기억을 더듬거려 보니
탁자에 세워진 빈 술병을 여덟개까지 샜던 일과
승용차 안에서 오랜만에 목청껏 노랠 불렀던 일만 가물거릴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울 일이다.



(맑은 날의 사자산의 철쭉 )

비가 그치려나 보다.
이 비에 송홧가루가 다 씻겨갔으면 하는 바램이나
아직은 시기상조일 듯 싶다.

숙취로하루종일부대낄 일이 심난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병만 마시는 건데..........